예전에 발췌해서 번역했던 거, 이번엔 다 해서 올린다. 일부 발췌된 걸 어디서 읽고난 뒤 인터넷에서 떠도는 자료를 찾은 거라 원문 자체가 좀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게 제일 긴 버전이었는데 아무래도 도입부가 꼭 잘린 것 같은 느낌. '비슷한 일'이 첫 문장에 나온다는 게 영 석연치가 않아서... 워낙 출처가
정확하게 밝혀진 곳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지구로부터의 편지'라는 책에 번역되어 있을 가능성도... 그럼 웬 삽질? ㅋ 나중에 수록된 책을 찾아서 다시 검토해 봐야 할 듯.
거의 막바지에 가서 갑자기 '이건 뭐지? 마크 트웨인은 **** 차별주의자?'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한 마디 약간 생뚱맞게 웃김. 무슨 정치적 맥락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던데. 그리고 광견병 운운하는 부분의 내용은 상당히 헷갈리고.
이런 글 읽다 보면 물론 천재적이라는 생각들지만, 이런 글과 '인간은 위대해'류의 글과 맞대놓고 보다 보면, 인류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자기연민과 자기학대의 끝없는 연쇄나 정신분열, 다중인격의 역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잘한다, 잘한다'해서 느슨해지면 이런 사람이 나타나서 마구 뺨이라도 휘갈기고, 그러고 나면 누군가 또 나타나서 '많이 아팠지?' 이러고 위로해 주고, 다시 뺨맞고 정신차리고... 뭐 이런 걸 연상하고 있는. 흠... -_-;
가장 열등한 동물
마크 트웨인
1572년 8월,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 경우엔 기독교인 대 기독교인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프로테스탄트들을 카톨릭교도들이 먼저 급습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것은 아마도 기억에 남을 성바르톨로뮤 축일이 될 것 같다. 이 반가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교황과 교황청에서는 공개적으로 신께 감사를 드렸다.
수 세기 동안 수백 명의 이교도들이 해마다 화형대에서 죽어 나갔다. 그들의 종교적 견해가 로마 교황청의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고 야만적 인간들이 제 이웃의 형제들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위선, 질투, 악의, 잔혹성, 복수심, 유혹, 강간, 강도, 사기,방화, 중혼, 간통, 그리고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을 온갖 방법으로 억압하고 모욕하는 일은 문명국과 비문명국의 구분없이 항상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류의 형제애'는 '일요일'에 강조되었고, '애국심'은 일요일, 평일 구분 없이 촉구되었다. 하지만 애국심은 인류의 형제애에 반(反)하는 생각을 요구하는 것 아니던가. 그리고 남녀평등은 고대나 현대, 문명이나 야만할 것 없이,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그간 --소위-- 열등한 동물들의 특징을, 인간의 특징이나 성향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는 내게 수치스러움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나로 하여금 인간이 열등한 동물에서부터 진화해왔다는 다윈주의 이론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저버리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이제 더 정확한 새 이론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이론은 바로 '고등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퇴화'설이다.
이 불쾌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나는 추측하거나 짐작하거나 억측한 바가 전혀 없고, 통상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말하는 방법만을 사용했다. 말하자면, 실제 실험에 상정된 모든 가정을 빠뜨리지 않고 검토했고, 실험 결과에 따라서 그 가정을 수용하거나 거부했을 뿐이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 앞서 전 단계를 하나하나 입증하고 규명했다. 이 실험은 런던 동물원(London Zoological Gardens)에서 수행되었으며, 몇 달에 걸친 수고스럽고 피곤한 작업 끝에 결론을 도출해낸 것이다.
구체적인 실험에 관련된 논의를 더 진척시키기 전에, 이 단계에서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은 점 두어 가지를 명시하겠다. 축적된 실험은 만족스럽게도 몇 가지 일반화에 도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문 다운로드 링크: Mark Twain, The Lowest Animal.
거의 막바지에 가서 갑자기 '이건 뭐지? 마크 트웨인은 **** 차별주의자?'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한 마디 약간 생뚱맞게 웃김. 무슨 정치적 맥락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던데. 그리고 광견병 운운하는 부분의 내용은 상당히 헷갈리고.
이런 글 읽다 보면 물론 천재적이라는 생각들지만, 이런 글과 '인간은 위대해'류의 글과 맞대놓고 보다 보면, 인류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자기연민과 자기학대의 끝없는 연쇄나 정신분열, 다중인격의 역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잘한다, 잘한다'해서 느슨해지면 이런 사람이 나타나서 마구 뺨이라도 휘갈기고, 그러고 나면 누군가 또 나타나서 '많이 아팠지?' 이러고 위로해 주고, 다시 뺨맞고 정신차리고... 뭐 이런 걸 연상하고 있는. 흠... -_-;
가장 열등한 동물
마크 트웨인
1572년 8월,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 경우엔 기독교인 대 기독교인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프로테스탄트들을 카톨릭교도들이 먼저 급습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것은 아마도 기억에 남을 성바르톨로뮤 축일이 될 것 같다. 이 반가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교황과 교황청에서는 공개적으로 신께 감사를 드렸다.
수 세기 동안 수백 명의 이교도들이 해마다 화형대에서 죽어 나갔다. 그들의 종교적 견해가 로마 교황청의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고 야만적 인간들이 제 이웃의 형제들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위선, 질투, 악의, 잔혹성, 복수심, 유혹, 강간, 강도, 사기,방화, 중혼, 간통, 그리고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을 온갖 방법으로 억압하고 모욕하는 일은 문명국과 비문명국의 구분없이 항상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류의 형제애'는 '일요일'에 강조되었고, '애국심'은 일요일, 평일 구분 없이 촉구되었다. 하지만 애국심은 인류의 형제애에 반(反)하는 생각을 요구하는 것 아니던가. 그리고 남녀평등은 고대나 현대, 문명이나 야만할 것 없이,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그간 --소위-- 열등한 동물들의 특징을, 인간의 특징이나 성향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는 내게 수치스러움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나로 하여금 인간이 열등한 동물에서부터 진화해왔다는 다윈주의 이론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저버리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이제 더 정확한 새 이론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이론은 바로 '고등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퇴화'설이다.
이 불쾌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나는 추측하거나 짐작하거나 억측한 바가 전혀 없고, 통상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말하는 방법만을 사용했다. 말하자면, 실제 실험에 상정된 모든 가정을 빠뜨리지 않고 검토했고, 실험 결과에 따라서 그 가정을 수용하거나 거부했을 뿐이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 앞서 전 단계를 하나하나 입증하고 규명했다. 이 실험은 런던 동물원(London Zoological Gardens)에서 수행되었으며, 몇 달에 걸친 수고스럽고 피곤한 작업 끝에 결론을 도출해낸 것이다.
구체적인 실험에 관련된 논의를 더 진척시키기 전에, 이 단계에서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은 점 두어 가지를 명시하겠다. 축적된 실험은 만족스럽게도 몇 가지 일반화에 도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립된 하나의 종(species)이다. 기후, 환경 등의 영향으로 (피부색, 신장,
정신적 역량 등에서) 미세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종이고, 다른 종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
2. 사지동물(quadruped) 역시 하나의 독립된 과(family)이다. 이 과도 그 내부에서 몇 가지 차이를 띄긴 한다. (피부색, 체구, 식성 등의 차이.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독립된 과이다.)
3. 다른 동물들이 속한 (조류, 어류, 곤충류, 파충류 등의) 과들도 역시 각각 다른 과와 구별이 된다. 그들은 고등한 동물부터 맨밑바닥에 있는 가장 열등한 인간까지 진화의 사슬을 이루면서 각각의 진화단계를 구성한다.
2. 사지동물(quadruped) 역시 하나의 독립된 과(family)이다. 이 과도 그 내부에서 몇 가지 차이를 띄긴 한다. (피부색, 체구, 식성 등의 차이.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독립된 과이다.)
3. 다른 동물들이 속한 (조류, 어류, 곤충류, 파충류 등의) 과들도 역시 각각 다른 과와 구별이 된다. 그들은 고등한 동물부터 맨밑바닥에 있는 가장 열등한 인간까지 진화의 사슬을 이루면서 각각의 진화단계를 구성한다.
내가 했던 실험 중엔 상당히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 나는 몇 년 전에 어떤 책에서, 몇몇 사냥꾼들이 한 영국인 백작을 위해 미국의
대평원에서 버팔로 사냥을 기획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거기서 한바탕 잘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바탕 재미를
위해 이 위대한 동물을 72마리나 죽이고 나서, 그 중 1마리만 조금 뜯어먹다 말았고 나머지 71마리는 전부 썩게 내버려 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작과 아나콘다의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 나는 아나콘다 우리에 어린 송아지 7마리를 들여 보냈다. 이 파충류는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바로 한 마리를 죽여서 통째로 삼키고는, 아주 흡족한 듯이 느긋하게 쉬었다. 더 이상 송아지에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해칠 의사도 전혀 없어 보였다. 다른 아나콘다들에게도 같은 실험을 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을 통해 입증된
결과는 백작은 잔인하고 아나콘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백작은 자기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별 이유도 없이 파괴해 버리지만,
아나콘다는 그러지 않는다. 이런 실험 결과는 곧 아나콘다가 백작보다 퇴화한 것이 아니란 점을 시사한다. 도리어 백작이
아나콘다보다 퇴화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백작은 그 도중에 아주 많은 걸 잃어버린 것 같다.
나는 자기가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액수의 돈을 축적한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모으고 싶은 허기에 시달리고, 그 허기를 잠깐 달래기 위해 무지하거나 무력한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의 푼돈을 뜯어내면서도 양심에 거리낌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 종류가 넘는 야생동물이나 가축들에게 많은 양의 식량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봤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다람쥐, 꿀벌, 그리고 특정한 새들이 축적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들조차도 겨울을 날 만큼의 식량이 축적되면 거기서 멈춘다. 그들이 속임수를 써서든 정직한 방법으로든 필요 이상으로 더 축적하게 만들 방법은 전혀 없었다. 개미들은 식량을 비축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연기를 좀 하는 듯 했지만, 그래도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난 개미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인간과 고등동물 사이에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즉, 인간은 탐욕스럽고 수전노 같지만, 고등동물들은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나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기가 받은 모욕이나 상처를 마음 속에 담아두고 곱씹으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복수를 하고야 마는 동물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런 복수의 열정은 고등동물에겐 없는 것이었다.
수탉은 여러 마리의 암탉을 거느리긴 하지만, 암탉들의 동의하에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완력과, 여성들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남성들만의 특권인 극악무도한 법을 빌어서 여러 여자들을 건드리고 또 거느린다. 그런 점에서 인간 남성은 수탉보다 훨씬 열등한 지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고양이는 도덕성이 좀 느슨하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다. 인간은 고양이로부터 퇴화하는 과정에서 고양이의 느슨한 도덕관념은 가져오고 그 무의식적인 측면은 빠뜨렸다. (그나마 용서받을 구실은 그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고양이는 순수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외설성, 음란성, 저속함.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그런 특징들은 철저히 인간에게만 귀속된다.) 고등동물에게선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숨기는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더럽혀진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감춘다. 가슴과 등을 내놓은 채로는 응접실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데, 그건 아마도 인간과 그 친구들이 그만큼 외설적인 제안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인간은 '웃을 줄 아는 동물'이다. 그러나 다윈이 지적했듯, 원숭이도 웃는다. 그리고 '래핑 잭애스(laughing jackass: 웃는 얼간이)'라는 이름을 지닌 오스트레일리아의 새도 웃을 줄은 안다. 아! 그런데 인간만이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그럴 만한 이유나 그래야만 할 경우가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 신문의 첫머리에 며칠 전 '세 명의 수도승이 불에 타 죽'었고, 수도원장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죽었는지 꼬치꼬치 물어볼까?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그러면 결국 수도원장이, 차마 지면에 실을 수조차 없을 만큼 잔혹한 방식으로, 신체훼손을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될테니까. 인간은 --북미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이라면-- 포로의 눈알을 파낸다. 존 왕이라면 골치아픈 조카를 처리하기 위해 불에 달군 쇠를 사용한다. 이교도들을 다루는 중세의 광신도라면 산 채로 껍질을 벗긴 뒤에 등에 소금을 뿌릴 것이다. 리처드 1세의 시대에는 수많은 유태인 가족들을 탑에 가둔 뒤에 불을 질렀다. 콜럼버스 시대에는 스페인계 유태인 가족을 포로로 잡은 뒤에... 아, 다음에 이어질 얘기는 지면에 싣기엔 부적절한 내용이라 더 쓸 수 없겠다. 우리 시대엔 어머니를 의자로 거의 죽을 때까지 팼던 영국인에게 10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반면 꿩알 4개를 손에 넣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한 사람에겐 40실링의 벌금을 매겼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잔인하다. 인간만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존재들에게 고통을 주는 유일한 존재다. 그것은 고등한 동물에게는 없는 특징이다. 물론 고양이가 겁먹은 쥐를 가지고 노는 경우는 있다. 그렇지만 고양이에겐 변명할 구실이 있다. 쥐가 고통을 당한다는 걸 모르고서 그렇게 한다는 사실이다. 고양이는 그래도 온순하다. 인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순하다. 쥐에게 겁을 좀 주긴 해도 해치진 않는다. 더구나 인간처럼 눈을 파내거나, 껍질을 벗기거나, 손톱 밑에 가시를 쑤셔넣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쥐를 가지고 노는 게 끝나면 고양이는 순식간에 쥐를 먹어치우고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잔인한 동물이다. 인간만이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고등 동물들은 개별적인 싸움을 하긴 하지만, 대중을 조직해서 싸움을 벌이진 않는다. 인간만이 그런 종류의 잔혹 행위 중의 잔혹 행위, 즉 전쟁을 행한다. 인간만이 자기 형제를 모아 같은 인류를 몰살하기 위해 냉혹하고 침착하게 전진한다. 인간만이 돈 몇 푼 때문에 행군한다. 미국의 독립혁명 때 군인들이 그랬고, 줄루 족과의 전쟁에서 소년에 불과했던 나폴레옹 왕자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입힌 적도 없고 사소한 다툼조차 한 적 없는 이방인들의 학살을 돕기 위해 그렇게 했다.
인간만이 자기 나라의 무기력한 동료에게서 강탈한다. 그의 소유물을 빼앗고 그를 소유지로부터 쫓아내고 파괴한다. 인간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이런 짓을 저질러 왔다. 이 지구상에는 정당한 소유주가 소유하고 있는 땅은 한 평도 없거나, 피와 권력에 의해 한 소유주에서 다른 소유주의 손으로, 한 사이클에서 다음 사이클로 넘어가지 않은 땅은 없을 것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노예다. 그리고 인간만이 유일하게 다른 존재를 노예로 부리는 동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항상 어떤 형태로든 노예였고,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자기 굴레에 놓고 노예로 삼아왔다. 우리 시대에 인간은 항상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었고, 다른 사람의 노동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더 적은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아 자기 일을 대신하게 만든다. 고등 동물만이 자신의 일을 직접 하고, 자기 생계를 직접 꾸린다.
인간만이 애국심을 안다. 인간만이 자기 나라의 깃발 아래 자신을 확립하고, 다른 나라들을 비웃으며 남의 나라 땅 한 조각을 빼앗고 자기 나라는 한 조각도 내 주지 않으려고, 갖가지 제복을 입은 암살범들을 비싼 돈을 들여가며 키운다. 그리고 전쟁의 사이사이에 그는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면서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를 위해 '입으로만' 일한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종교적인 동물이다. 인간만이 진정한 종교를-그것도 몇 가지씩이나-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줄 아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 이웃의 종교관이 옳지 않을 경우엔 그를 칼로 찌를 수도 있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형제들의 행복과 천국으로 향한 길을 닦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전세계를 묘지로 만들어버렸다. 케사르의 시대에도 그랬고, 마호메트의 시대에도 그렇게 했으며, 종교재판에서도 그랬으며, 프랑스에서 두 세기 동안 그렇게 했으며, 메리의 시대에 영국에서도 그렇게 했다. 인류가 빛을 본 순간부터 그렇게 해 왔다. 인류는 오늘날 크레타 섬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 내일도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고등 동물에게는 종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세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인간들은 말한다. 대체 왜 그럴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최소한 그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의 실험은 인간은 비이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앞서 묘사한 인류의 역사를 상기해 보라. 그가 뭔지는 몰라도 이성적 동물이 아니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인류의 역사는 엄청난 광인의 기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은, 이런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눈 하나 꿈쩍 않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자신의 기준에 따르면 분명 맨밑바닥에 속하면서 말이다.
사실 인간처럼 구제불능으로 어리석은 존재는 없다. 다른 동물들이라면 쉽게 익힐 수 있는 간단한 것들조차도 인간은 배우지 못한다. 난 한 번은 이런 실험을 한 적도 있다. 한 시간동안 고양이와 개가 친구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한 우리에 넣었다. 그리도 또 한 시간 동안 그들과 토끼가 친구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이틀동안 여우, 거위, 다람쥐, 그리고 비둘기 몇 마리까지 포함시켰다. 마지막엔 원숭이까지. 그들은 서로 평화롭게 공존했고, 심지어 서로 다정하기조차 했다.
그 다음에 나는 또 다른 우리에다가는 아일랜드 티퍼래리 출신의 카톨릭교도를 집어넣었다. 그가 좀 길들여졌다 싶을 때 스코틀랜드 애버딘 출신의 장로교도를 넣었다. 그 다음엔 터키 콘스탄티노플 출신의 이슬람교도,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기독교도, 아르메니아교도, 미국 아칸소의 미개척지에서 온 감리교도, 중국의 불교도, 인도의 힌두교 성지 베나레스 출신의 브라만을 차례차례 넣고, 마지막으로 영국 워핑 출신의 구세군 대령. 그리고 난 꼬박 이틀 동안 동물들과 인간들을 가둬둔 우리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돌아가 보니 고등동물들이 모여있던 우리 안은 괜찮았다. 그러나 다른 우리 안에는 터번과 페즈, 격자 무늬 천[각주:1] 조각 등만이 피와 살과 뼈와 뒤엉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고, 실험을 위해 사용했던 표본들 중 단 한 명의 인간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성적 동물은 신학적인 세부항목들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고, 문제를 기어이 상급법원까지 끌고가서야 끝장을 본 셈이었다.
성품의 진정한 고결함을 놓고 보면, 인간은 가장 평범한 고등동물에게도 미치지 못할 존재란 사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런 고도에 도달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결함은 타고난 것이고, 근절하거나 말살할 수 없는 채로 몸 안에 박혀 있는 것임을 인간 스스로가 증명했다. 그러므로 고등동물에 도달한다는 것은 인간에겐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결함은 도덕의식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의 퇴화의 비밀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자질이다. 그 외에 다른 역할은 없다. 그리고 다른 기능을 수행할 줄도 모른다. 애초에 그 외 다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것만 없었다면,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곧바로 고등동물의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도덕의식의 역할은 단 한 가지밖에 없고, 그 한가지 기능--인간으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것--은 인간에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건 마치 질병처럼 무가치하다. 사실, 그건 분명한 질병이다. 광견병도 지독하지만, 이 질병만큼 지독하진 않다. 광견병은 인간이 건강한 상태에선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 만든다. 자신의 이웃을 물어죽일 수 있는 것. 광견병에 걸리면 그래도 더 행복한 인간은 될 수 있다. 그런데 도덕의식은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다. 그것은 인간이 수천 가지 방식으로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다. 도덕의식에 비하면 광견병은 무고한 병이나 다름없다.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은 더 행복한 인간조차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원초적 저주가 뭔지 밝혀낼 차례인가? 간단명료하게, 출발의 지점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혀볼까? 바로 인간에게 도덕의식을 부가한 것. 선악을 구별할 능력을 부여한 것. 그것이 생김으로써, 필연적으로 악을 행할 능력도 생겼다. 왜냐면 행위자의 의식 속에 악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악한 행위란 것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인간이 타락했고 퇴화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먼 태고적 어떤 조상으로부터 --어쩌면 광활한 수평선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미세한 원자의 방울 같은 것에서부터-- 곤충에서 곤충으로, 동물에서 동물로, 파충류에서 파충류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한 점 티조차 없던 순결함으로부터 먼 길을 와, 마침내 발달의 맨 밑바닥에 이르면 인류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우리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다. 프랑스인 말고는.
인간의 시각, 후각, 청각, 공간감각 따위란 얼마나 열등하기 짝이 없는 것이던가. 콘도르[각주:2]는 5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시체를 볼 수 있지만, 인간은 망원경이 있어도 어림없는 노릇이다. 블러드하운드[각주:3]는 이틀 전의 냄새까지도 맡아 추적할 수 있다. 울새는 지렁이가 땅 속에 굴을 파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고양이는 바구니 속에 갇힌 채 20마일 떨어진 곳에 버려져도,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길을 거슬러서 집에 돌아올 수 있다.
인간은 딱 한가지 측면에서만 엄청난 우월성을 드러낸다. 지능, 그것만큼은 가히 최고다. 고등동물들도 그 점에선 인간에게 범접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유일무이한 우월성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천국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마련된 적 없다는 점은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인간 자신이 천국을 상상할 때조차도 지적인 기쁨을 누릴 공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누락되었다는 게 참 이상한 일 아닌가. 그건 어쩌면 천국은 고등동물을 위해 마련된 곳이라는 암묵적 고백이 아닐까. 이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그리고 그 속엔 아주 암울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건 바로 어쩌면 우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착각해 왔던 것과는 달리,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나는 자기가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액수의 돈을 축적한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모으고 싶은 허기에 시달리고, 그 허기를 잠깐 달래기 위해 무지하거나 무력한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의 푼돈을 뜯어내면서도 양심에 거리낌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 종류가 넘는 야생동물이나 가축들에게 많은 양의 식량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봤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다람쥐, 꿀벌, 그리고 특정한 새들이 축적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들조차도 겨울을 날 만큼의 식량이 축적되면 거기서 멈춘다. 그들이 속임수를 써서든 정직한 방법으로든 필요 이상으로 더 축적하게 만들 방법은 전혀 없었다. 개미들은 식량을 비축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연기를 좀 하는 듯 했지만, 그래도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난 개미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인간과 고등동물 사이에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즉, 인간은 탐욕스럽고 수전노 같지만, 고등동물들은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나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기가 받은 모욕이나 상처를 마음 속에 담아두고 곱씹으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복수를 하고야 마는 동물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런 복수의 열정은 고등동물에겐 없는 것이었다.
수탉은 여러 마리의 암탉을 거느리긴 하지만, 암탉들의 동의하에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완력과, 여성들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남성들만의 특권인 극악무도한 법을 빌어서 여러 여자들을 건드리고 또 거느린다. 그런 점에서 인간 남성은 수탉보다 훨씬 열등한 지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고양이는 도덕성이 좀 느슨하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다. 인간은 고양이로부터 퇴화하는 과정에서 고양이의 느슨한 도덕관념은 가져오고 그 무의식적인 측면은 빠뜨렸다. (그나마 용서받을 구실은 그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고양이는 순수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외설성, 음란성, 저속함.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그런 특징들은 철저히 인간에게만 귀속된다.) 고등동물에게선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숨기는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더럽혀진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감춘다. 가슴과 등을 내놓은 채로는 응접실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데, 그건 아마도 인간과 그 친구들이 그만큼 외설적인 제안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인간은 '웃을 줄 아는 동물'이다. 그러나 다윈이 지적했듯, 원숭이도 웃는다. 그리고 '래핑 잭애스(laughing jackass: 웃는 얼간이)'라는 이름을 지닌 오스트레일리아의 새도 웃을 줄은 안다. 아! 그런데 인간만이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그럴 만한 이유나 그래야만 할 경우가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 신문의 첫머리에 며칠 전 '세 명의 수도승이 불에 타 죽'었고, 수도원장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죽었는지 꼬치꼬치 물어볼까?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그러면 결국 수도원장이, 차마 지면에 실을 수조차 없을 만큼 잔혹한 방식으로, 신체훼손을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될테니까. 인간은 --북미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이라면-- 포로의 눈알을 파낸다. 존 왕이라면 골치아픈 조카를 처리하기 위해 불에 달군 쇠를 사용한다. 이교도들을 다루는 중세의 광신도라면 산 채로 껍질을 벗긴 뒤에 등에 소금을 뿌릴 것이다. 리처드 1세의 시대에는 수많은 유태인 가족들을 탑에 가둔 뒤에 불을 질렀다. 콜럼버스 시대에는 스페인계 유태인 가족을 포로로 잡은 뒤에... 아, 다음에 이어질 얘기는 지면에 싣기엔 부적절한 내용이라 더 쓸 수 없겠다. 우리 시대엔 어머니를 의자로 거의 죽을 때까지 팼던 영국인에게 10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반면 꿩알 4개를 손에 넣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한 사람에겐 40실링의 벌금을 매겼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잔인하다. 인간만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존재들에게 고통을 주는 유일한 존재다. 그것은 고등한 동물에게는 없는 특징이다. 물론 고양이가 겁먹은 쥐를 가지고 노는 경우는 있다. 그렇지만 고양이에겐 변명할 구실이 있다. 쥐가 고통을 당한다는 걸 모르고서 그렇게 한다는 사실이다. 고양이는 그래도 온순하다. 인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순하다. 쥐에게 겁을 좀 주긴 해도 해치진 않는다. 더구나 인간처럼 눈을 파내거나, 껍질을 벗기거나, 손톱 밑에 가시를 쑤셔넣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쥐를 가지고 노는 게 끝나면 고양이는 순식간에 쥐를 먹어치우고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잔인한 동물이다. 인간만이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고등 동물들은 개별적인 싸움을 하긴 하지만, 대중을 조직해서 싸움을 벌이진 않는다. 인간만이 그런 종류의 잔혹 행위 중의 잔혹 행위, 즉 전쟁을 행한다. 인간만이 자기 형제를 모아 같은 인류를 몰살하기 위해 냉혹하고 침착하게 전진한다. 인간만이 돈 몇 푼 때문에 행군한다. 미국의 독립혁명 때 군인들이 그랬고, 줄루 족과의 전쟁에서 소년에 불과했던 나폴레옹 왕자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입힌 적도 없고 사소한 다툼조차 한 적 없는 이방인들의 학살을 돕기 위해 그렇게 했다.
인간만이 자기 나라의 무기력한 동료에게서 강탈한다. 그의 소유물을 빼앗고 그를 소유지로부터 쫓아내고 파괴한다. 인간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이런 짓을 저질러 왔다. 이 지구상에는 정당한 소유주가 소유하고 있는 땅은 한 평도 없거나, 피와 권력에 의해 한 소유주에서 다른 소유주의 손으로, 한 사이클에서 다음 사이클로 넘어가지 않은 땅은 없을 것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노예다. 그리고 인간만이 유일하게 다른 존재를 노예로 부리는 동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항상 어떤 형태로든 노예였고,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자기 굴레에 놓고 노예로 삼아왔다. 우리 시대에 인간은 항상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었고, 다른 사람의 노동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더 적은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아 자기 일을 대신하게 만든다. 고등 동물만이 자신의 일을 직접 하고, 자기 생계를 직접 꾸린다.
인간만이 애국심을 안다. 인간만이 자기 나라의 깃발 아래 자신을 확립하고, 다른 나라들을 비웃으며 남의 나라 땅 한 조각을 빼앗고 자기 나라는 한 조각도 내 주지 않으려고, 갖가지 제복을 입은 암살범들을 비싼 돈을 들여가며 키운다. 그리고 전쟁의 사이사이에 그는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면서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를 위해 '입으로만' 일한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종교적인 동물이다. 인간만이 진정한 종교를-그것도 몇 가지씩이나-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줄 아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 이웃의 종교관이 옳지 않을 경우엔 그를 칼로 찌를 수도 있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형제들의 행복과 천국으로 향한 길을 닦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전세계를 묘지로 만들어버렸다. 케사르의 시대에도 그랬고, 마호메트의 시대에도 그렇게 했으며, 종교재판에서도 그랬으며, 프랑스에서 두 세기 동안 그렇게 했으며, 메리의 시대에 영국에서도 그렇게 했다. 인류가 빛을 본 순간부터 그렇게 해 왔다. 인류는 오늘날 크레타 섬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 내일도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고등 동물에게는 종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세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인간들은 말한다. 대체 왜 그럴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최소한 그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의 실험은 인간은 비이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앞서 묘사한 인류의 역사를 상기해 보라. 그가 뭔지는 몰라도 이성적 동물이 아니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인류의 역사는 엄청난 광인의 기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은, 이런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눈 하나 꿈쩍 않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자신의 기준에 따르면 분명 맨밑바닥에 속하면서 말이다.
사실 인간처럼 구제불능으로 어리석은 존재는 없다. 다른 동물들이라면 쉽게 익힐 수 있는 간단한 것들조차도 인간은 배우지 못한다. 난 한 번은 이런 실험을 한 적도 있다. 한 시간동안 고양이와 개가 친구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한 우리에 넣었다. 그리도 또 한 시간 동안 그들과 토끼가 친구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이틀동안 여우, 거위, 다람쥐, 그리고 비둘기 몇 마리까지 포함시켰다. 마지막엔 원숭이까지. 그들은 서로 평화롭게 공존했고, 심지어 서로 다정하기조차 했다.
그 다음에 나는 또 다른 우리에다가는 아일랜드 티퍼래리 출신의 카톨릭교도를 집어넣었다. 그가 좀 길들여졌다 싶을 때 스코틀랜드 애버딘 출신의 장로교도를 넣었다. 그 다음엔 터키 콘스탄티노플 출신의 이슬람교도,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기독교도, 아르메니아교도, 미국 아칸소의 미개척지에서 온 감리교도, 중국의 불교도, 인도의 힌두교 성지 베나레스 출신의 브라만을 차례차례 넣고, 마지막으로 영국 워핑 출신의 구세군 대령. 그리고 난 꼬박 이틀 동안 동물들과 인간들을 가둬둔 우리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돌아가 보니 고등동물들이 모여있던 우리 안은 괜찮았다. 그러나 다른 우리 안에는 터번과 페즈, 격자 무늬 천[각주:1] 조각 등만이 피와 살과 뼈와 뒤엉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고, 실험을 위해 사용했던 표본들 중 단 한 명의 인간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성적 동물은 신학적인 세부항목들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고, 문제를 기어이 상급법원까지 끌고가서야 끝장을 본 셈이었다.
성품의 진정한 고결함을 놓고 보면, 인간은 가장 평범한 고등동물에게도 미치지 못할 존재란 사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런 고도에 도달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결함은 타고난 것이고, 근절하거나 말살할 수 없는 채로 몸 안에 박혀 있는 것임을 인간 스스로가 증명했다. 그러므로 고등동물에 도달한다는 것은 인간에겐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결함은 도덕의식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의 퇴화의 비밀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자질이다. 그 외에 다른 역할은 없다. 그리고 다른 기능을 수행할 줄도 모른다. 애초에 그 외 다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것만 없었다면,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곧바로 고등동물의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도덕의식의 역할은 단 한 가지밖에 없고, 그 한가지 기능--인간으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것--은 인간에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건 마치 질병처럼 무가치하다. 사실, 그건 분명한 질병이다. 광견병도 지독하지만, 이 질병만큼 지독하진 않다. 광견병은 인간이 건강한 상태에선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 만든다. 자신의 이웃을 물어죽일 수 있는 것. 광견병에 걸리면 그래도 더 행복한 인간은 될 수 있다. 그런데 도덕의식은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다. 그것은 인간이 수천 가지 방식으로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다. 도덕의식에 비하면 광견병은 무고한 병이나 다름없다.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은 더 행복한 인간조차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원초적 저주가 뭔지 밝혀낼 차례인가? 간단명료하게, 출발의 지점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혀볼까? 바로 인간에게 도덕의식을 부가한 것. 선악을 구별할 능력을 부여한 것. 그것이 생김으로써, 필연적으로 악을 행할 능력도 생겼다. 왜냐면 행위자의 의식 속에 악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악한 행위란 것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인간이 타락했고 퇴화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먼 태고적 어떤 조상으로부터 --어쩌면 광활한 수평선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미세한 원자의 방울 같은 것에서부터-- 곤충에서 곤충으로, 동물에서 동물로, 파충류에서 파충류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한 점 티조차 없던 순결함으로부터 먼 길을 와, 마침내 발달의 맨 밑바닥에 이르면 인류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우리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다. 프랑스인 말고는.
인간의 시각, 후각, 청각, 공간감각 따위란 얼마나 열등하기 짝이 없는 것이던가. 콘도르[각주:2]는 5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시체를 볼 수 있지만, 인간은 망원경이 있어도 어림없는 노릇이다. 블러드하운드[각주:3]는 이틀 전의 냄새까지도 맡아 추적할 수 있다. 울새는 지렁이가 땅 속에 굴을 파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고양이는 바구니 속에 갇힌 채 20마일 떨어진 곳에 버려져도,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길을 거슬러서 집에 돌아올 수 있다.
인간은 딱 한가지 측면에서만 엄청난 우월성을 드러낸다. 지능, 그것만큼은 가히 최고다. 고등동물들도 그 점에선 인간에게 범접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유일무이한 우월성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천국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마련된 적 없다는 점은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인간 자신이 천국을 상상할 때조차도 지적인 기쁨을 누릴 공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누락되었다는 게 참 이상한 일 아닌가. 그건 어쩌면 천국은 고등동물을 위해 마련된 곳이라는 암묵적 고백이 아닐까. 이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그리고 그 속엔 아주 암울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건 바로 어쩌면 우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착각해 왔던 것과는 달리,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원문 다운로드 링크: Mark Twain, The Lowest Ani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