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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이 항상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린 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면, 어떤 사람이나 동물들을 무서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어두운 방에 대해서는 항상 두려움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누가 봐도 특이한 그 점이, 그 점을 제외하고는 극히 단순한 나의 심리에 얼마나 지장을 주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와 반대로, 나는 죽어가는 것보다 죽음이 항상 더 두려웠다. 나는 심지어 그 때 고통당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경멸감마저 가졌으며, 그 경멸감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항상 내 육체를 즐겁게 하는 감각보다는 내 의식을 더 가치있게 여겼다. 내 생애에서 유일하게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 (최근에, 내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나는 전신마취를 거부했다. 그리고 국소마취만을 허락했다.[각주:1]
만일 내가 오늘 내가 자초한 죽음의 길을 택한다면,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저주받은 인간으로서의 [...]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자살을 택하는 것은 도덕적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초래한 도덕적 진공상태 때문이다.
현재의 내 상태는 위대한 신비주의와 초월적인 포기선언을 불러오는 그런 류의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선택들은 믿음 때문에 하는 것이기라도 하다. 나는 믿음조차 없다. 실은 나의 이 믿음 없음이 --내가 애초부터 그럴 수 없어서든 아니면 어떻게 믿음을 가져야 할 줄 몰라서든-- 세계에 대한 나의 의식인 이 진공상태의 기원이다.
...내가 파리에서 플롬비에르 후작과 결투를 했을 때.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결투라는 것이 어이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사회적 관습을 수용했고 그것이 내게 제공하는 사회적 이점을 즐겼고 (일차적으로, 내 작위에서 오는 특권부터 시작해서), 결투가 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란 이유로 유독 그 관습만 회피하는 것은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내가 즉사할 가능성보다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인식이 나로 하여금 그 사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저해하기도 했다. 나는 고통당하는 것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통 자체를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모든 종류의, 혹은 일말의 집착조차도 경멸했다. 나의 이런 태도가 그것에 대해 추상적인 방식으로 언급하려는 나의 열망마저 좌절시킨 것이기도 하다.
어째써 결투에 관한 나의 가장 큰 우려가 --다른 모든 우려들은 퇴색되게 할 만큼 큰-- 상대에게 "패배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지, 즉 내가 그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결투장에서 입증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지는 참으로 모를 일이다. 개탄스럽지만 결코 꺾일 줄 모르는 나의 한 가지 자질, 즉 지는 것을 절대 감당하지 못하는 성격을 항상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으며, 나의 분노를 감추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발 아래 놓이게 하는-- 게임이나 경쟁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품위를 잃지 않고 그럴 핑계를 찾을 수만 있다면, 결투를 피하도록 했던 이유였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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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아델라이드의 유혹)[각주:2]
그들은 (음탕한 이들은) 인간 감정의 탐사되지 않은 측면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육체적인 접촉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장막에 가려진 감각적인 것들에 빛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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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몇 명을 유혹하긴 했지만, 내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며, 변명의 여지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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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만 먹었으면 우리 집에서 일하던 하녀들 중 그 누구라도 유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컸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쾌활한 탓에 커 보였다. 게다가 막상 그들 앞에 서면 나는 저절로 주춤하게 되고 겁을 먹어서, 사실 유혹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작거나 여려서,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또 다른 이들은 전혀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특수한 현상을 마치 삶의 일반적인 현상을 지나치듯, 그저 지나쳐갔다.누군가를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육체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관능성, 다른 영혼들의 실존에 대한 나의 인식--이런 것들이 내 삶을 제한하는 것들이었으며, 나는 그런 것들이 과연 다른 누군가는 물론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수 있는지 자문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유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내가 유혹하지 않은 이들은 다른 이들의 유혹에 넘어갔다. 다른 남자들은 두 번 생각하지 않을 것들에 대해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데, 내가 하지 않은 것들을 결국 다른 이들이 하고 마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의문에 빠졌다. 만약 그것이 나에게 고통만 주는 것이었다면, 난 대체 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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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가책이란 행위의 죽음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아무리 사소한 행위라 해도, (행위가 클 경우 이 명제는 더욱 옳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가진 존재라면, 그 누군가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지 않거나, 다른 누군가르 아프게 하지 않거나, 우리가 후회할 수밖에 없는 어떤 측면을 전혀 갖지 않는 행위란 없다. 나는 종종 은둔자의 진정한 철학은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관념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로 인해 행할 수밖에 없는 적대적 행동을 거부하려는 데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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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너무나 진부하게 여겨져 난 회피하려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는데, 막상 그것이 행해진 것을 보고는,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에선 지극히 정상적인 일들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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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의 잠재의식적인 비밀: 사물의 낭만적인 면을 정력적으로 살아가고, 삶의 거친 면을 낭만적으로 살아가는 것.아무 것도 가르치지 마라, 왜나면 당신에겐 여전히 모든 것이 배워야 할 것 뿐이므로.
꿈이, 너무나 생생하거나 익숙하면, 똑같이 압제적인, 새로운 현실이 되고 만다. 그것은 더 이상 은신처가 되지 못한다. 꿈꾸었던 군대들은 결국, 세상의 전투와 충돌 속에 무너져 가는 다른 이들처럼, 패배를 당해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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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 백일몽에 잠기는 것-- 유행하는 옷이나 왕자, 공주, 연인, 유명인 따위에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이나 간직할 법한 영혼의 버성김--은 내가 항상 극도로 혐오하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경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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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꾸는 것은 광인이나 사춘기 소녀의 악덕이라 여겨 거부했다. 그렇지만 나는 현실 또한 거부했다. 아니,실은 현실이 날 거부했다. 그렇지만 그게 나의 무능력 때문인지, 의기소침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 대한 내 이해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양자의 즐거움이 나에겐 모두 허락되지 않았다--현실의 입맞춤도, 상상된 세계의 부드러운 손길도.[각주:4]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나 한때 나를 둘러쌌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 누구도 나에게 해코지를 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나를 잘 대해 주었지만, 모두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거리감이 내 안에 있는 것임을, 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착각 없이, 내가 항상 존중받아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은 없다. 오늘 나는 그럴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존경할 만한 자질들과 강렬한 감정을 갖추고 있었지만 [......], 사랑이라고 알려진 그런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
......나와 같은 영혼을 가진 인종--루소, 샤토브리앙, 세낭꾸르(Sensncour) 아미엘(Amiel).[각주:5] 하지만 루소는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고, 샤토브리앙은 [......], 아미엘은 최소한 일기라도 남겼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남기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고통을 당했던 질병의 훨씬 더 극단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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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 한 번도 향수를 느낄 만한 거리도 없었고, 내 정신이 항상 내 감정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단 한 번도 향수를 느껴본 적이 없다. 내 삶을 가지고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애석함을 안고 추억할 거리도 아무 것도 없다. 나도 한 때 희망이란 걸 품은 적이 있었지만 -- 어차피 존재하지 앟는 건 그 무엇도 될 수 있으니-- 나는 이제 더 이상 희망도 품지 않는다. 왜냐면 미래가 과거와 다를 게 뭐가 있는지 난 알지를 못하겠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가 그저 과거이기 때문에 그리워하기도 하고, 그런 이들에겐 과거가 그 시절의 자기 자신과 더불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심지어 나빴던 것조차 좋아 보인다. 과거가 영영 사라지고,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과거에 대해 비통해 하기엔, 시간의 추상화라는 건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과거에 대해 비통해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는 것은 거부한다.나는 단 한 번도 향수를 느껴번 적이 없다. 원통함 없이 추억할 수 있는 시절이 내 삶엔 단 한 순간도 없다. 모든 시절에 난 똑같았다. 경기에서 졌거나, 자신이 차지한 보잘것없는 승리조차도 실은 차지할 자격이 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 나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왜냐면 희망이 없다는 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몸부림은 더 힘겨워졌고, 내 희망은 더 지지부진해졌으며, 지금의 나와 한때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모습 사이의 간극은 내 헛된 몸부림의 밤에 더욱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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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과 내가 한때나마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간직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를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은,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동네에서 화재 경보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순간 나는 우리 집이 불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국 아니란 것이 밝혀졌지만.) 내 모든 원고들이 불에 타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로 인해 한때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우리 집에 불에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무심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모든 원고들이 불타버린다면 내 삶이 얼마나 더 단순해질까,라는 상상에 도리어 안도감마저 느꼈다. 예전 같았다면, 파편적이지만 정교하게 다듬은 내 삶의 역작인, 내 원고를 잃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나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겠지만, 이제 나는 그런 가능성을, 내 인격의 현현이 제거됨으로 인해 내 인격마저 제거되어버리는 치명타로 여기는 대신, 그저 내 운명이 가져올 무심한 사건이라고 여길 뿐이다.나는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함을 향한 몸부림이 어떻게 우리를 끝내 소진시킬 수도 있는지를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고, 삶의 무용함을 영혼으로 깨달은 위대한 신비주의자와 수도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몇 자 끄적여진 종이에서 잃어버리게 될 나는 무엇일까? 예전 같았으면 "전부."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오늘 난 "아무 것도." 혹은 "별로." 혹은 "뭔가 이상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 자신은 나에게 객관적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과연 나를 찾았는지 혹은 잃어버렸는지 확답은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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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있는 게 우리 집일 수도 있을까? 내 모든 원고들, 내 모든 삶에 대한 내 모든 표현들이 불꽃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한때는 그런 재앙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나는 --공포를 느꼈는지 혹은 느끼지 않았는지, 아니면 놀랐는지 놀라지 않았는지도 더 이상은 모르겠다-- 그것이 모두 불타버린다 해도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내 영혼에서 어떤 나만의 샘이 말라 버린 것일까?그때 나는 비로소 무미건조하고 피로한 해들이 거듭되면서, 내 영혼도 그렇게 깊고도 무미건조한 피로감으로 가득 차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깜빡 잠이 들었고, 내 영혼의 특권들--기쁘게 꿈꾸려는 영혼의 욕망, 강렬하게 꿈꾸려는 영혼의 감정, 다르게 꿈꾸려는 영혼의 고민들-도 모두 나와 더불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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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물리적 거부반응이라고밖에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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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론자처럼 생각하고 유물론자처럼 행위하는 것. 이는 그다지 부조리한 신념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신념이다.인류의 삶이란 일상적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교적 진화의 연속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인류는 이상적인 것에 매혹되기 마련이고, 이상이 더 고귀하면 할수록, 덜 인간적이면 인간적일수록,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한 문명에서 다른 문명으로 전해지는, 인류의 문명화된 삶의 실천에는 (그것이 만약 진보적 실천이라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문명화된 인류는 순결을 설교하는 종교를, 평등을 설교하는 종교를, 평화를 설교하는 종교를 두 팔 벌리고 환영한다. 하지만 보통의 인류는 인류가 다하는 그 순간까지 종족을 번식하고, 차별을 하고, 끊임없이 충돌할 것이다.
(to be continued...)
- 다른 판본에서는 "나는 심지어 국소마취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만약 그 당시에 그런 기술이 가능했다면, 국소마취 정도는 허락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본문으로]
- 남작의 다른 초기작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공책에 담겨 있던 마리아의 유혹에 관한 이 서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는 못했다. [본문으로]
- 브 남작이 쓴 검은 공책의 첫 페이지에 적힌 이 편린과 같은 앞에는 "2장(章)"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본문으로]
- 다른 판본에는 "현실의 즐거움도, 상상된 세계의 즐거움도,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본문으로]
- 프랑스 작가 에띠엔 피베르 드 세낭꾸르(1770-1846)는 우울하고 실의에 빠진 듯한 어조가 특징적인 소설
을 썼다. 앙리-프레데릭 아미엘(1821-81)은 스위스의 미학과 철학 교수였는데, 페소아의 <동요의 서>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그의 유작 으로 사후에 유명해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