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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공통점이 없어야만 할 것 같은 정상적인 무신론자와 정상적인 유신론자는 사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 안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한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론이나 테제 같은 건 없다. 점성술은, 마치 꿈과 같이, 별세계다. 점성술이란, 우리가 믿기로 마음을 먹은 상상력의 영역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한 뒤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점성술에 관한 소설과 논문은 각각 다른 주제에 관한 소설들이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첩보물과 사회소설 사이의 차이나, 형사물과 연애소설 사이의 차이보다도 더 작다.[각주:1]하지만 루소나 샤토브리앙이나 [......]을 읽다 보면, 내가 객관적이라거나 실제적이라거나 [.......]라고 숭앙했던 것들이, 실은 그들과 내가 본능적이고 끔찍할 만큼 동일하다는 사실로부터 나를 제외시켜주진 않는다는 것을,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닫게 된다. 그들이 쓴 어떤 부분들은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할 정도다. 그들의 글은 분명 내가 쓴 것은 아니지만 --나로선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묘한 부조리함을 통해-- 나에겐 없는 나의 쌍둥이 형제, 나와는 다르게 나와 동일한 사람이 쓴 것만 같다.
나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동경하진 않는다. 그들은 내게 항상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곤 여기지 않는데--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들에 비하면 그들은, 물론 매력은 있지만 또한 불완전하기도 한,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우월한 자질이라는 것 역시도 --[......] 차이를 고수하자면-- 어린이가 어른에 비해 갖는 장점이다. 그들은 자라나면서 복잡성을 얻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어떤 민족이 따라올 수 없었던, 감정과 감각 면에서의 아이와 같은 즉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성장이 그들에게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성장하면서 그들은 그들을 삶과 사유, 예술에서 다른 모든 이들과 구분지어주었던, 단순하고 직설적인 에고이즘, 신선하고 인간적인 상상력, 그리고 사실에 대한 세심한 주의 등을 모두 잃어 버렸다. 그리스인들이 세상에 기여한 바는 그들이 고안한 어린아이의 놀이 같은 측면에서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제비뽑기로 투표를 하는 것이라거나,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과 관련된 결정에서 군인들이 --그들의 사령관과 동일한 자격으로--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 등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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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관성도 없고, 쓰다 말다 한 낙서 더미를 문학작품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니! 이 결정적 순간에 내가 이 흩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완성된 한 편의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만약 사유의 조직능력이 작품을 물질화시킬 수 있었다면, 만약 이 조직화가 짧은 시나 간략한 에세이를 완성시킬 수 있을 정도의 감정적 강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내가 쓰려던 작품은 당연히 형체를 갖췄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결정의 중개자로서의 내 힘을 빌지 않고도, 작품은 내 안에서 저절로 형체를 갖췄을 것이기 때문이다.공격적이지 않은 내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에 내가 집중했더라면, 나의 완성불가능한 걸작의 파편들로부터 짧은 에세이 몇 편 정도는 완성해낼 수 있었으리라는 걸 안다. 나는 완성되고 균형잡힌 몇 편의 소소한 산문 작품들을 써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메모한 것들 가운데서 이런저런 구절들을 엮기만 했더라도 진부하고 피상적이지 않으면서, 단순히 생각의 얼개만 있는 책 이상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자만심은 나로 하여금 내 정신이 해낼 수 있는 능력 이하의 것에 안주하도록 허락하질 않는다. 나는 단 한 번도 중도에 포기하여, 내 작품이 내 인격 전체와 내 열망 전체를 표현하지 않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다. 내가 만일 내 정신이 종합적 작업을 하는 데 역부족이라고 느꼈다면, 나는 아마도 내 자만심이 광기의 일종이라 여겨 거기에 굴레를 씌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 정신은 어떤 결함도 없었고, 종합능력과 조직능력에 항상 뛰어났다. 문제는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드는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아붓길 꺼렸던 나의 미온적인 의지에 있었다.
이런 기준에 따른다면 그 어디에서도 창조적 작품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만약 모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오직 완벽한 것만을 해내려고 욕망했다거나, (어차피 완벽이란 불가능한 것이니) 최소한 자신의 인격 전체에 완전히 상응하는 어떤 것을 해내려고만 욕망했다면, 나처럼 그저 포기해버리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적이기보다는 의지적인 사람들, 이성적이기보다는 충동적인 사람들만이, 이 세계의 현실적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칼라일이 말한 '흩어진 파편들(Disjecta membra)'이란 것만이, 모든 시인 혹은 모든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것이다.[각주:2] 그러나 나를 죽였고, 앞으로 나를 다시 죽일 나의 강렬한 자만심은, 기형적으로 변형되고, 훼손된 신체를 통해 필연적으로 그 불완전함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몸담았던 영혼마저 그런 것으로 규정되어 후세에게 굴욕을 당하게 한다는 생각은 용납할 수가 없다.
영혼의 존엄성이 관련된 한, 나는 수도자와 보통 사람 사이의 중간이라거나 그들 사이의 어중간한 지대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당신이 만약 행동가라면 당신은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포기하는 사람이라면, 그럼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행동할 거면 행동이 수반하는 무자비함을 가지고 행동하고, 포기할 거면 포기의 절대성을 가지고 포기하라. 눈물이나 자기 연민 따위 허락하지 말고, 포기의 열정이라는 측면에서만이라도 고귀함을 지키면서 포기하라. 자신을 경멸하되, 그럴 때조차 존엄성을 지키며 경멸하라.
세상 앞에서 운다는 것 --그 울음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세상이 그 울보에게 더 마음을 열면 열수록, 그래서 그 울음이 더 공개적인 것이 될수록, 그것은 그의 수치가 될 것이다-- 이는, 칼조차 빼앗긴 패잔병이 가한 마지막 일격에 내면의 삶을 공격받은 것과 같은, 궁극적 치욕이다. 우리들은 모두 삶이라는 본능적인 연대에 속한 군인들이다. 우리는 이성의 법에 따라 살든, 아예 법에 구애받지 않고 살든 해야 한다. 유쾌함은 개들을 위한 것이고, 우는 소리는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남자라면 오직 명예와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벽난로의 불길 속에 마침내 내 원고의 마지막 장까지 불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이를 절실하게 느꼈다.
허약한 인간들이 자신의 사적인 고민에서 비롯된 슬픈 코미디를 가지고 보편적 비극으로 격상시키려는 경향에는 뭔가 불쾌한 --어처구니 없기 때문에 더더욱 불쾌한-- 구석이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나는 항상 --나중에는 그것이 부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위대한 비관주의 시인들의 풍부한 감정을 경험하는 데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그들의 생애에 대해 읽게 되면서 나의 환멸은 더 커져만 갔다. 나는 지난 세기의 위대한 비관주의 시인들--레오파르디, 비그니, 그리고 안테루 데 켄탈--을 점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의 비관주의가 성적인 것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작품 안에서 찾아내고, 그들의 전기적 사실을 통해 확인받은 뒤, 내 정신은 구토를 느꼈다. 나는 사람들이 --특히 이들처럼 예민한 사람들이-- 그 이유가 뭐가 됐든, 레오파르디나 켄탈처럼 성관계를 박탈당하거나, 혹은 비그니의 사례처럼, 성관계를 자주 욕망하면서도 그것을 갖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비극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적인 문제들이고 모두가 읽는 시에서는 공론화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밀한 삶에 속한 것이며 문학의 일반적 재료로서는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성관계의 부재나 불만족스러운 성관계는 전형적이고 광범위한 인간 경험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저급한 문제들을 (그것이 아무리 시적으로 사용된다 해도, 저급한 건 여전히 저급한 거다) 직접적으로 노래했거나, 자신의 영혼에 수영복을 입혀 내보내는 대신, 그것을 발가벗겨 보여주었다면, 그래도 그 슬픔의 근원적 원인이 주는 순수한 폭력성 때문에라도 그나마 존경어린 비탄 정도는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모든 것을 완전히 개방함으로써-- 옳든 그르든, 이런 종류의 감적적 진부함에 부가되는 사회적인 조롱을 어느 정도라도 덜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겁쟁이라면, (이것이 더 현명한 결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해 아예 함구하든가, 아니면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겁쟁이야."라고 말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뿐이다. 전자의 경우엔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엔 진실함을 드러낼 수 있다. 양자의 경우에 모두 그는 최소한 웃음거리가 되는 건 피할 수 있다. 왜냐면 전자의 경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웃음 거리가 될 만한 것이 아예 없고, 후자의 경우엔 스스로 자신의 비겁함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이상 더 드러날 것이 없다. 그러나 만약 겁쟁이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 하거나, 비겁함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걸 확인받으려 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드러내지도 그렇다고 감추지도 못하는 모호하고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고백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일반 대중에겐 우스꽝스럽고 지성인들에게는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에 불과하다. 이것이 내가 비관주의 시인들이나, 자신의 사적인 슬픔을 보편적인 지위로 끌어올리려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인간상이다.
만일 레오파르디의 무신론이 성관계에 의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란 걸 내가 알았다면, 대체 어떻게 그의 무신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만일 안테루 데 켄탈의 안타까움, 슬픔, 절망이 현실세계에서 그 짝을 찾지 못한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의 황량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그의 절망과 슬픔, 안타까움을 내가 도대체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격렬한 분노가 표현된 비그니의 대표작 "삼손의 분노"[각주:3]라는 시를 보고 난 뒤, 비평가 파게(Faguet)[각주:4]가 평한 "극소수에게만 사랑받거나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데서 오는 극심한 고통"이라는 구절을 접하고는, 그것이 그저 바람둥이의 평범한 고통을 거창하게 표현한 데 불과하다고 느꼈다면, 여성에 관한 비그니의 비관주의에 어떻게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나는 여성들 앞에서 수줍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레오파르디 작품의 핵심적 주장을 대체 그 누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나를 사랑해주는 여인이 없어서 나는 슬프다. 그러므로 슬픔은 보편적 조건이다."라는 안테루 데 켄탈의 결론을 어떻게 거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의 고귀함과 선함이 결여된, 불쾌하고, 잔인하고 비열한 족속들이다."라는 비그니의 태도를 어떻게 본능적으로 경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적 원칙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허위이고, 어처구니 없기 때문에 미학적이지 않다. 완벽한 존엄성과 자기 확신을 갖춘 작품들이 대중의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면 그런 작품들은 대중이 이해하진 못해도 그들을 사로잡는 어떤 자질이 있거나, 대중들이 느끼기에도 자신들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가 있어, 단지 자신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비웃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순수이성비판>을 보고 웃는 경우는 없다.[각주:5]
정신의 존엄함은 정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은 그 외부에 있음을 깨닫는 데 있다. 자연의 법칙이 우리의 바람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세계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고, 우리의 슬픔이 별들의 운행이나 지금 나의 창밖을 지나쳐간 사람들의 도덕적 조건에 대해 아무 것도 증명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 과정에서 실망을 하고 안 하고와는 무관하게) 비로소 정신의 진정한 목적과 영혼의 합리적 존엄성이 존재하게 된다.
심지어 바로 이 순간, 죽음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나를 매혹하지 못할 때조차도 (그리고 죽음은 곧 '무(無)',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재빨리 창가에 기대어, 고요한 저녁 공기 속으로, 경건하게 노래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한 무리의 유쾌한 농장 일꾼들을 본다. 나는 그들의 삶은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내 손으로 내 무덤을 파기 직전인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궁극의 자부심을 가지고 그 사실을 인정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나의 개인적인 슬픔이 나무들의 보편적인 푸르름, 젊은 남녀의 자연스러운 기쁨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침잠해가는 나의 차디찬 마지막 길이, 별들의 운행을 주관하여 세상엔 봄을 불러와 장미꽃이 만발하게 하는 반면 나에게는 내 삶을 끝내도록 하는, 자연의 법칙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내 눈 앞에서, 실은 모든 것과 모든 이들 앞에서, 사라지면서, 단지 아타이드의 알바루 코엘료, 테이브의 14대 남작이 자기가 쓰고 싶던 책을 자신은 끝내 쓸 수 없다는 사실을 회한 속에 깨달았다고 해서, 어떻게 이 봄이 슬프고, 꽃들이 고통에 빠져 있으며, 강물이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농장 일꾼들이 노래 속에 근심과 비통함이 서려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의 비극을 나 홀로 간직한다. 나는 고통스럽지만, 형이상학이나 사회학을 개입시키지 않고, 나 홀로 고통과 맞선다. 나는 내가 삶에 정복당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앞에서 비굴해지진 않는다.[각주:6]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비극을 안고 살며, 만약 비극적 사건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한 가지 비극 정도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비극을 떠들어대지 않는 것은 각자의 몫이며,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 간직한 채, 다른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글을 쓰고 --고귀한 결단력을 발휘해-- 그것으로부터 보편적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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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성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다.[각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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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서 검투사가 되도록 내몰려 칼을 휘둘러댔다면, 나는 패배당했을 것이다.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나는 자유로워지리라. 그리하여 나는 운명의 여신에게 경건하게 인사를 올린 뒤, 내가 정복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내 생애 마지막 몸짓을 통해, 스스로 정복자가 되리라.케사르에 의해, 죽음으로써만 끝이 날 전투에 임하도록 경기장에 던져진 자들 중, 죽는 자는 정복당한 자가 될 것이고, 죽이는 자는 정복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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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의 운명을 타고 난 노예로서 경기장에 던져진 나는, 별들에 둘러싸인 채 원형 경기장에 자리한 케사르에게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으며, 인사를 올린다. 노예에게는 자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아무런 자부심도 느끼지 않으며,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에겐 미소지을 일이 없으니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한 채, 나는 나를 낮추어 인사를 올린다. 나는 나를 철저히 좌절시킨 법칙을, 나 자신은 좌절시키지 않고자 인사를 올린다. 그러나 인사를 마친 뒤 나는, 전투에서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을 칼을 내 가슴에 찔러 넣는다.만약 죽는 자가 정복당한 자이고 죽이는 자가 정복자라면, 이 행위를 통해, 내가 정복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스스로 정복자가 될 것이다.
(The End)
뒷쪽은 부록이었고, 실제 본문은 41페이지밖에 안 돼서 생각보다 더 일찍 끝나버렸다. 다음에는 이어서 부록에 있는 글 몇 편을 마저 번역할 것이다.
- 이 단락에 이어지는 검정 노트 속 메모들은, 테브 남작의 작품을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하려 했던 페소아의 계획을 엿보게 해준다.번역자 겸 저자로서의 서문. [원문은 영어]어떤 작품이 예술작품이거나 예술작품이 되려 한다면, 서문은 붙이지 말아야 한다. [원문은 포르투갈어] [본문으로]
- 칼라일의 말을 좀 더 정확히 옮기자면, '모든 시인, 혹은 모든 인간에게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흩어진 파편들(disjecta membra)뿐이다'라는 것이었다. (<영웅들, 영웅숭배, 그리고 역사에서의 영웅적인 것에 관하여> 중에서.) [본문으로]
- 이 시는 1930년 7월 9일자로 기록된 알바루 데 캄포스의 시에 인용되기도 했다. [본문으로]
- 에밀 파게(1847-1916)는 자신의 시대에 가장 저명한 프랑스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 [본문으로]
- 다른 판본에서는 "그 논리학자를 조롱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본문으로]
- 다른 판본에서는 "자살의 이름을 안고 무덤으로 가되, [......]의 성을 안고 가지는 않으리라."라고 썼다. [본문으로]
- "그것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 이유다."라는 것이 다른 판본의 표현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