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약간 언급한 적 있었던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작가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영문 산문집 몇 권을 손에 넣었다. 그는 1888년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났지만,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 새로 부임한 영사와 결혼하면서
7살 때부터 17살 때까지 더반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더반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공 나탈 주의 신흥도시였기 때문에 정규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수줍음 많던 외국인 학생은 영작문에서만큼은 그의 동급생들을 월등히 앞질렀다. 그렇지만 1920년 다시 한 번
미망인이 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와는 아버지가 다른 세 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리스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익혔던 영어 덕분에, 그는 리스본에서 다니던 대학을 자퇴한 뒤에도, 해외무역을 하는 포르투갈 회사들을 위한 영어 편지를
작성해주거나 번역을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리스본에 돌아온 이후에도 그는 한동안 영어로 글을 썼고, 영문 작품을 통해 문학계에 입문하고 싶은 희망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포르투갈에서 살게 되면서 그는 거의 문학을 통해서만 영어를 접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의 영어 문체는 아무래도 당대의 영어보다는 좀더 문어적이면서 고어투에 가까웠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그의 영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대의 어떤 영어권 작가도 구사할 수 없는 독특한 영문학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는 영어뿐 아니라, 그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도 작품을 남겼고, 일부 불어로 남긴 작품들도 전해진다. 그렇지만 다수의 그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뒤에야 발견된 트렁크 속에 담겨 있던 유작들어서, 어떤 의미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그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열린 셈이었다. 그 트렁크 속에는 29권의 공책뿐 아니라, 미발표 시들, 미완의 희곡과 단편 소설들, 번역들, 언어학적 분석들, 그리고 연금술과 신비주의에서부터 미국의 백만장자들, 로마의 황제부터 마하트마 간디 등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관한 온갖 논픽션 작품들의 원고뭉치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페소아는 작품들을 여러 언어로 썼다는 점 외에도, 많은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그가 매 작품을 위해 사용한 가명들을 단지 그 이름만 가짜가 아니라, 관점, 문체뿐 아니라 성장환경과 성격, 외모 등 모든 측면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와는 완전히 다른, 각각의 가짜 인물들이라고 보았다. 그의 가명들은, 그가 만들어낸 다른 인물들을 위한 이름들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것을 이명(異名, heteronym)이라고 지칭했다.
내가 가장 먼저 접했던 그의 작품의 한 '쪼가리'는 <동요의 서(The Book of Disquiet)>라는 것이었지만, 그 책은 아직 배달이 되지 않았고, 내가 먼저 손에 넣은 것은 <금욕주의자의 교육(The Education of the Stoic)>이라는 산문이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각각 베르나르두 소아레즈(Bernardo Soares)와 테이브의 남작이라는 두 사람의 가명의 인물들에 의해 쓰여졌는데, 페소아는 이 두 인물과 이 작품을 일종의 거울상, 서로 마주보는 대립항으로서 창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자신의 한계에 직면한 이의 작품이란 의미에서, 전자는 절망의 서(書)라면, 후자는 자살의 서(書)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
이 작품의 원문이 영어였다면 번역의 의미가 더 충실하겠지만, 어쨌든 포르투갈어를 영어로 번역한 번역본을 바탕으로 페소아의 <금욕주의자의 교육(The Education of the Stoic)>을 당분간 번역해서 올릴 예정이다. 내가 저본으로 삼은 영문 번역본은 Richard Zenith가 번역한The Education of the Stoic (Exact Change, 2005)이다. 전체가 81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인 데다, 그것마저도 일관된 빽빽한 서사가 아닌 파편 같은 메모처럼 적혀 있어서,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지만 매일 일정한 분량을 꾸준히 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참고로 이 작품은페소아가 테이브 남작이라는 가명으로 쓴 유일한 원고이다.
금욕주의자의 교육
-테이브 남작이 남긴 유일한 원고
-우수한 예술을 생산하는 것의 불가능성
페르난두 페소아
서랍에서 발견된 원고.[각주:1]
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아 내가 알지도 못하는 호텔 직원의 지저분한 손에 들어가게 하는 대신, 힘을 줘서 잡아당겨야 열 수 있는 서랍 속에 넣어두기로 했다. 서랍 속에 책을 넣을 때 뭔가에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서랍이 그렇게 좁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역사상 가장 지독하고 치명적인 가뭄으로 인해 비탄에 빠졌다. 그것은 곧 모든 노력이 무용하다는 것과 모든 계획이 허영에 불과하다는 심오한 자각의 가뭄이었다.
나는 공허의 정점, 절대무(無)의 완성에 도달했다. 나를 자살로 이끌어 갈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찍 잠자리에 들게끔 하는 충동과 같은 류의 것이다. 나는 모든 의도들이 죽도록 지겨워졌다.
이 시점에서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만약...
그래, 하지만 만약은 항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며, 만약 그것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면, 만약 그것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 따위는 대체 왜 하는 것인가?
*
나는 내 삶의 끝이 가까이 다가왔길 바라기 때문에, 그것이 가까이 와있다는 걸 느낀다. 나는 지난 이틀 동안 내 모든 원고들, 죽어버린 내 생각들의 메모들, 스케치들, 그리고 내가 결코 쓰지 않을 작품들의 일부 완성된 단락들을 모두 하나하나 태웠다. (그것들을 중간중간에 다시 읽어보다 보니 이틀이 꼬박 걸렸다.) 나는 이 희생을 치르는 데 망설임은 없었지만, 내 곁에 계속 머무는 슬픔 속에서 나는 -다리를 건넌 뒤 자신이 지나온 다리를 불태우는 사람처럼- 내가 버리고 떠나려는 삶의 해안가로부터 떠났다. 나는 자유로워졌다. 나는 준비가 됐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 -가능한 한 정확하게- 내 내면에 관해 쓰여진 그림, 내 삶에 관한 지적인 회고록을 남기려 한다. 아름다운 거짓말들의 연쇄를 남길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모든 거짓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진실의 작은 조각을 남기고 싶다.
이 원고가 나의 유일한 원고가 될 것이다. 나는 베이컨처럼 후세들의 자비로운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각주:2] (비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미래가 곧 나의 동료가 될 사람들을 위한 배려로 이 원고를 남긴다.
나와 삶 사이에 놓인 최후의 끈만을 남겨둔 채 모든 유대이자 속박을 끊어버리고 나서, 내 말들에 힘을 부여해줄 감정적인 명료성을 내 영혼은 얻었고, 정신적인 명료성을 내 지성은 얻었다. 이는 내가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문학 작품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내가 어째서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나의 고백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정의(definition)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쓰기 시작하면서, 약간이나마 진실의 외관을 띄고 뭔가를 쓸 수 있으리라 느낀다.
자살의 희생자는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 사실 신문 기사들은 모두 그에 합당한 경의를 표했다. 이를테면, Diario de Noticias[각주:3]의 지역 기사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다뤘다.
테이브의 20번째 남작, 아타이드의 알바루 코엘류 경은 어제 그의 마시에라 영지에서 자살했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저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정직한 성품 덕분에 모두에게 동경을 받았던 테이브 남작의 이 슬픈 죽음은 사람들을 많은 충격에 빠뜨렸다.
마시에라 영지, 1920년 6월 12일.
*
같은 영혼 혹은 같은 사람 속에 지적인 감성과 도덕적 감성이 동일한 강도를 갖는다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인간이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도덕적이기 위해서 그 사람은 약간은 바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지적이기 위해선 그 사람은 약간은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하여금 동시에 그 두 가지가 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대체 창조의 어떤 게임이나 아이러니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나로선 불행하게도, 이 이중성이 나에겐 생겨나 버렸다. 이 두 가지 미덕을 모두 부여받고서, 나는 결코 쓸모있는 인간이 될 수가 없었다.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 자질의 과도함 때문에, 나는 삶을 살아가는 데 부적합해져 버렸다.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라이벌이 나타나면 나는 언제 어디서고,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포기해 버렸다. 그것은 내가 삶에서 망설이지 않은 극소수의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내 자만심은 다른 누군가와의 경쟁이라는 관념을, 더구나 그것은 패배의 끔찍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나는 경쟁적인 게임에 참여하는 것 역시도 거부했다. 내가 졌을 경우, 나는 항상 분노로 이글거렸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냐고? 아니다. 나는 내가 체스나 휘스트[각주:4]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 정신의 가장 절박한 노력으로도 결코 억제하거나 없앨 수 없었던 순수한 자만심, 무자비하고 걷잡을 수 없는 자만심 때문이었다. 나는 삶과 세계로부터 거리를 유지했고, 세계나 삶의 어떤 요소들과 마주치는 것은 마치 보편적인 하인의 갑작스런 반항처럼, 아래로부터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나를 불쾌하게 했다.
내가 뭔가 잘못된 길을 가리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시작하는 고통스러운 회의의 순간에 나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내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의 과도한 무게였다. 나는 나의 세습적 영향과 가정교육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나는 귀족성이나 사회적 지위라는 무익한 관념에 콧방귀를 뀔 순 있었지만, 그것을 잊어버릴 순 없었다. 그건 마치 타고난 비겁함 같은 것이어서, 내가 그것을 혐오하고 그것에 저항하긴 해도, 그것이 내 마음과 정신을 불가해한 끈으로 묶어놓은 것까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한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을 어떤 소녀와 결혼하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내 영혼의 우유부단함 속에, 나와 그녀의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것은 14대에 걸친 남작들, 내 결혼식에서 주민들 전체가 히죽거리며 능글맞게 웃을 모습에 대한 내 상상, 나와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의 빈정거림, 그리고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생각들로 이루어진 엄청난 거북함이었다. 너무도 많은 하찮은 생각들이, 내가 마치 범죄라도 저지른 것 마냥,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이성적이며 무심한 인간으로서 나는 내가 업신여긴 이웃들 때문에 내가 행복할 기회를 (스스로) 놓쳤다.
그녀의 사랑으로도 덮을 수 없고 그녀의 헌신으로도 잊게 할 수 없는, 내가 옷입고 행동하고 내 집에서 사람들을 접대하는 방식(아마 아무도 접대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텐데도)과 모든 고상한 표현들과 순진무구한 태도들. 마치 진지한 일들의 유령처럼 내 앞에 나타난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나를 항상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불가능성들의 끝없는 거미줄 앞에서 밤새 잠 못 이룬 , 그녀를 취하고 싶은 내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나를 설득하려는, 어떤 논거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을 거듭 고민한 끝에, 마치 풀리지 않는 문제로부터 물러나듯 사랑으로부터 물러나기로 결심했던 그 오후를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날의 봄 공기 속 부드러운 향기마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기억한다. 그 때는 5월, 살짝 여름의 느낌이 나는 5월이었는데, 내 영지 주변의 활짝 핀 꽃의 꽃잎들은 천천히 지는 햇빛 아래 그 빛깔이 바래지는 듯했다. 나는 후회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몇 그루 되지 않는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다. 저녁을 일찍 먹고 난 나는 별로 그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그늘과, 나뭇잎들의 희미한 바스락거림 아래에서 마치 하나의 상징처럼 홀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완전히 단념해 버리고 싶은 욕망, 마침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면서, 그토록 많은 욕망과 희망과, 그들을 이룰 수 있는 그토록 많은 외적 조건들과 그들을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너무도 많은 내적인 불가능성 때문에 극심한 구토를 느꼈다. 그리고 이 아련하고도 슬픈 순간이 내 자살의 출발점이 되었다.
*
...지성이 마치 혈액순환과도 같은 이들의 나약하고 비자발적인 고행 -- 삶의 본질적 조건, 삶의 자연스러운 토대들 가운데 하나.
그 가을 저녁에 공기는 부드럽게 흩어지고, 멀리 보이던 산은 하늘 위에 차가운 선명함을 띈 채 두드러져 보였지만, 나는 그것들에 대해선 별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오직 내 생각들에만 집중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것들은 내게, 그렇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슬프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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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
...합쳐 놓고 보면, 사실 혼자이고 싶은 바람에 지나지 않았던, 내 모든 변덕과 욕망의 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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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불만과 복수심에 가득 차있던 나는, 십대가 되면서 과민함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그 못된 기질을 모두 잃어버렸다. (생각컨대, 추상적
사유 능력의 발달이 이것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난 다소 변형된 형태로 내 어린 시절의 본질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생각을 놓치거나, 내가 쓰고 싶었던 어떤 구절을 잊어버리거나, 특정한 관점을 기억해내지 못하면 여전히 스스로를
괴롭혔다. 나는 종종 이 거친 윤곽들에 어떤 물리적 형태를 부여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질투하는 것이었고,
나는 추상적인 것에 탐닉했으며, 그리고 나는 이 탐욕과 보복의 감정이, 아마도 양자가 모두 못된 기질의 어떤 형태란 점에서, 피와 살을 나눈 것이란 사실을 알아챘다.
(to be continued...)
페소아는 작품 제목과 두 개의 부제를 적은 페이지에 이 발견의 경위까지 함께 기록했다. 이는 테이브 남작이 기존의 작품을 벽난로에 모두 불태운 뒤에 남긴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원고다. [본문으로]
1625년에 작성된 그의 유서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이름과 기억을 위해 나는 이 인류의 자비로운 말들에, 낯선 나라들, 그리고 다음 시대에 남긴다." [본문으로]
1864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창간된 신문. 페소아 생전이나 지금이나, 포르투갈 최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