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과 활동가 -혁명의 이론가와 혁명의 실천가- 사이의 간극이 지금처럼 큰 시대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거대한 사회운동을 위해 성명서 같은 논문을 몇 년동안이나 써내던 지식인들은, 막상 진짜 사회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자 혼란스러움, 혹은 최악의 경우엔, 그러한 현실 운동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경멸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불과 2,3년 사이에 지구상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역사적 가능성'의 의미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그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여전히- '반세계화 운동'이라 불리는 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근거없는 추문의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그것은 순수한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고, 뉴욕타임즈 같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소스들을 통해 수집된 자료에 의존한 탓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 진보 진영에서 배출된 글이라 해도 논점을 놓치기 일쑤고,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어쨌든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안들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인류학자이면서 활동가로서 내가 -특히, 직접행동과 연관된 다분히 급진적(radical) 운동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일반적인 오해들 몇 가지는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결과가 반드시 달갑진 않을수도 있다. 생각컨대, 오랫동안 스스로를 급진파라고 자처했던 사람들이, 자기가 실은 자유주의자(liberals)였다는 사실을 선선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데서 대부분의 망설임, 뜨악함이 생겨난 것 같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 정의를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사실 국가와 자본이라는 지배적 제도를 심각하게 뒤흔들 생각은 없었다. 심지어 혁명적 변화를 보고 싶어하는 많은 이들조차도 그런 급진적 정치를 위한 창조적 힘이 대부분 아나키즘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선뜻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전통은 지금껏 그들이 많은 경우 무시해 왔던 것이었고, 그러므로 소위 '반세계화' 운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제 와서 그런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아나키스트로서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이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또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하는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문제의 주된 논점은 아니다. 자신들의 행위를 바꾸는 유일한 정치적 행동이 정부에 호소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부터, 국가 권력에 대항하여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대안으로서 선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직접행동'은 그 개념부터 자유주의적(libertarian)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아나키즘은 이 운동의 핵심이자 정신이다. 운동의 새롭고도 희망적인 측면은 모두 거기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지는 장에서 나는 이 운동에 관련된 가장 일반적인 오해 세 가지를 해명해 보겠다. 아나키스트들이 '세계화'란 것에 이른바 '반대'를 한다는 오해, 아나키스트들이 이른바 '폭력'을 사용한다는 혐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나키스트들에겐 일관된 이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오해. 그리고 나서 그 시각에 비춰 급진적 지식인들이 자신의 이론적 실천을 재규명할 방안도 제안해 보겠다.
세계화 운동?
'반(反)세계화 운동'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미디어가 고안한 용어였고 실제 활동가들은 항상 그런 표현에 대해 껄끄러움을 느꼈다. 이
운동이 무언가에 반대를 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역사 발전에 오직 한 방향의 가능성만 있다고 주장한 일종의 시장
근본주의인 -좀 더 적절한 표현은 '시장 스탈린주의'일 듯하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세계지도를 펼쳐 든 엘리트
경제학자들과 대기업의
홍보담당관들은, 그나마 일말의 민주적 의무라도 지려고 했던 기관들로부터 모든 권력을 넘겨받았다. 그런 다음엔 선거를 거치지 않은 조약기구인 IMF, WTO, NAFTA 등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 에스토니아, 타이완 등지에선 "우리는 신자유주의 거부 운동을 한다."라고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에선 언어가 항상 문제다. 미국의 미디어 기업들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획일적인
집단일 것이다. 미국은 내세울 것이라곤 신자유주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가 유일한 현실적 지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관한 비판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다. 기껏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같은 선전 용어 뿐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활동가들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정치 팜플렛이나 보도 자료에서 행여 '신자유주의'의 '신...'자만 꺼내도, 곧바로 엘리트만을 대상으로 했다느니, 배제주의적이라느니 하면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그 말을 대신할 표현을 찾기 위해 골몰한 결과로 나온 것이 '세계정의운동 (global justice movement)', '다국적 기업에 의한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 등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썩 만족스럽거나 딱 맞아떨어지질 않아서, 실제로 회의에 가 보면 '국제화 운동'과
'반국제화 운동'이라는 상반된 표현을 같은 의미로 혼용해서 쓰는 경우를 빈번히 본다.
반면 '세계화 운동'이란 표현은 오히려 적절하다. 세계화라는 것이 국경의 소멸과, 사람, 재산,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세계화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세계화의 산물이며 그것에 참여하는 대다수 집단들 -특히 급진적 집단들-이 IMF나 WTO보다 훨씬 더 세계화에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18이나 11·30 같은 전지구적인 행동의 날을 처음 제안한 것도 지구적 민중행동(People's Global Action)이라는 세계적 네트워크였다. (11·30 은 1990년 시애틀에서 열린 WTO 회의 개최반대시위의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지구적 민중행동은 그 유명한 '인간다움을 향한 신자유주의 반대 대륙간회의'에서 생겨났다. 이 회의는 사파티스타의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표현한
바대로 '세계의 모든 저항세력에 의해' 발족되어, 1996년 8월 사파티스타의 본거지인 치아파스에서 열렸다. 5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기가 되어 무릎까지 차오른 정글의 진흙탕을 뚫고 사파티스타가 점령한 라 레알이다드(La
Realidad)로 속속 모여들었다. '대륙을 가로지른 저항의 네트워크'를 위한 비전은 제2차 라 레알리다드 선언문에 명시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개별적 투쟁과 저항을 묶는 집단적 네트워크,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륙간 네트워크, 인간다움을 향한 대륙간
네트워크를 만들 것을 선언한다."
"이 네트워크는 전쟁을 수행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목소리들의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이 목소리들의 네트워크는 단지 목소리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향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과 저항을 해나갈 것이다.
이 네트워크는 권력이 우리에게 약속한 죽음에 저항하고, 다섯 개 대륙을 덮는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이 네트워크에는 조직적 구조라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는 중심적 수뇌부나 결정권자도 없었고, 사령부나 위계도 없었다. 우리들, 저항하는 우리들이 곧 네트워크였다.
이듬해, 야바스타(Ya Basta!)
조직 내부의 유럽계 사파티스타 지지자들이 2차 대륙간회의(
encuentro)를 스페인에서 조직했다. 이때 네트워크 절차에 관한 구체적 방안들에 대한 논의가 좀 더 진전되었다. 그리고 1998년 2월에 제노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지구적 민중행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미 처음 시작될 때부터 이 집단은 아나키스트 단체나 스페인, 영국, 독일의 급진적 노동조합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간디 사상에 입각한 인도의 사회주의 농민연맹(KRRS: Karnataka State
Farmer's Association),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 어민연합체, 아르헨티나의 교사노조, 뉴질랜드 마오리족이나
에콰도르의 쿠나인과 같은 원주민집단, 브라질의 토지없는 노동자 운동, 중남미의 도망 노예들이 세운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를 비롯한
다른 많은 집단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캐나다의 우편노조와 몬트리올을 본거지로 한 아나키스트 단체인 CLAC를 제외하고는 북미권을
대표하는 단체는 오랫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다. 특히 캐나다 우편노조는 인터넷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진 지구적 민중행동과 북미대륙 사이의 의사소통의 허브 역할을 했다. 비단 운동의 기원뿐 아니라, 그 수요도 국제주의적이었다(internationalist).
이태리 야바스타의 3강령 프로그램에서는 '기본 생계비', 국제적 시민권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그리고
신기술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이는 아주 교묘한 형태의 보호주의 정책의 산물인 특허권을 사실상 극도로 제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을 보편적으로 보증해줄 것을 요구한다. 국경없는 네트워크에서는 -' 비합법인(불법인) 사람은 없다'가 그들의
슬로건이다- 폴란드와 독일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국경과 시칠리 섬, 스페인의 타리파 곶 등지에서 1주일간의 캠프, 독창적
형식의 저항을 위한 실험실 등을 조직했다. 활동가들은 국경경비대로 분장을 해서 오데르 강에 배를 잇달아 띄워 다리를 만들고,
프랑크프루트 공항에 오케스트라들을 불러 공항을 봉쇄한 뒤 이민자 강제추방을 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강제추방 과정에서
루프탄자와 KLM 항공을 탔던 이민자들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올 여름 캠프는 유럽 전체로 향하는 수 천, 수 만의 공항
터미널을 거치는 이민자나 활동가,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검색하고 통제할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인, 쉔겐 정보
시스템(Schengen Information System)의 고향,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열릴 예정이다.
활동가들은 '세계화'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비전은 실상 자본과 상품의 이동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사람과 정보, 사상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도리어 그 장벽을 높이려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NAFTA 체결 이후
미국 국경경비대의 규모는 거의 3배나 증가했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효과적으로 빈곤의 장벽 속에 가두어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지 못한다면, 애초에
나이키나 갭(Gap)에서 그 지역으로 생산공장을 옮긴 것이 무의미해져 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면,
신자유주의 기획 전체가 무너져 버릴 것이다. 이 점이 바로 현대 세계에서 '주권'이 쇠퇴하고 있다고 말할 때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이다.
지난 세기 민족 국가가 이룩한 주된 성과가 바로 세계 곳곳에 경찰력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는 장벽을 만든 것이 아니던가. 진정한 세계화의 이름으로 우리가 투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국제적인 통제 시스템이다. 운동 과정에서 점점 더 높은 수위의
국가의 억압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과 국가의 탄압 메커니즘 (경찰, 감옥, 군대)의 확장된 연합 관계가 곧 우리의
분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프라하의 IMF 회의, 그리고 니스에서의 유럽연합 회의에서 국경 문제는 유럽의 쟁점 현안이
되었다. 작년 여름 퀘벡에서 열린 FTAA
정상 회담 때 (최소한 백인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취급되었던, 그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자기 나라 통치자들에 대한 청원권을 요구하는 미래의 세계시민들 앞에는 하루 아침에 요새가 되어 그들을 가로막았다.
이른바 공무수행을 위해 퀘벡을 방문한 각국의 수뇌들에게 대중들이 접촉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퀘벡시 중심에 3km에 달하는
'장벽'이 세워졌는데,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란 용어가 갖는 인간적 함의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벽을 허물기 위해 철사용 가위와 갈고리를 들고 등장한 블랙 블록(Black Bloc)과,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온 철강노조부터 모호크족 전사에 이르는 시위대의 다양한 풍경은 -바로 그런 경계를 가로지른 다양성 때문에- 운동 역사상 가장 강렬한 순간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 이 운동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전자가 주로 서구의 조직
모델을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데 그쳤다면, 후자는, 다른 건 몰라도, 흐름의 방향은 그와 정반대였다. 이 운동을 대표하는
많은, 어쩌면 대부분의, 기술들은 -대규모 비폭력 시민 불복종까지 포함해- 남반구(global south)에서 먼저 고안되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 점이 아마도 이 운동에서 가장 급진적인 점일 것이다.
억만장자와 광대
미디어 기업들에서는 뭔가 대규모 행동만 일어났다 하면, '폭력'이란 단어를 마치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반복해서 되뇌는-
진언(mantra)처럼 사용한다. '폭력 시위', '폭력 충돌', '경찰이 폭력 시위대의 본부 급습' 등의 표현은 물론 심지어는 '폭력적
폭동'이란 말까지. (폭동이란 건 정의상 폭력적인 것 아닌가? 대체 폭력적이지 않은 폭동 말고 딴 게 또 있나?) 이런 표현은,
실제로 일어난 사태를 평이한 언어로 기술해서, '사람들은 물감폭탄을 던지고, 빈 가게의 창문을 깨고,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해
서로 손을 맞잡았는데, 경찰은 몽둥이로 그들을 때렸다'고 하면, 자칫 진짜 폭력적이었던 것은 경찰밖에 없다는 인상을 줄까 봐
우려될 때 동원되었다. 그런데 아마도 최대의 범죄자는 미국의 미디어일 것이다. 비록 지난 2년 사이에 직접행동이 많이 전투적으로
바뀌었다곤 해도, 미국의 활동가가 시위 도중 누군가에게 물리적 상해를 입혔다는 사례는 단 한 건도 찾아낼 수 없었다. 사실
당국자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운동이 '폭력적'이란 사실이 아니라, 도리어 상대적으로 너무도 폭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정부는 분명히 혁명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무장저항의 형태를 띄길 거부하는 이런 운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전혀 모를 뿐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파괴하려는 노력은 상당히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구호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방식에 대한 대안이
예전엔 간디 식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과 전면적인 폭동이라는 두 가지 형식밖엔 없었다면, 직접행동 네트워크(Direct
Action Network), 거리를 되찾으려는 사람들(Reclaiming the Streets), 블랙 블록 혹은 뚜뜨
삐앙쉐(Tute Bianche)는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그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이들
집단은 모두 이른바 시민불복종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거리공연, 축제, 그 외에 '비폭력 전투'라고밖엔 달리 부를 수
없는 형식의 시위형태에서 여러 요소들을 결합했다. ('비폭력 전투'에서 '비폭력'이란 말은 사람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상해를
입히는 모든 행위를 기피한다는 의미로 블랙 블록 계열의 아나키스트들이 사용한 것이다.)
그 가운데 이탈리아의 야바스타(Ya Basta!)는 뚜뜨 비앙쉐(Tute Bianche) 또는 하얀 작업복(white-overalls) 전술로 유명하다. 시위대들은 발포고무 소재의 갑옷부터 타이어, 오리 모양 튜브, 헬멧, 화학물질 방지용 백색 작업복(chemical-proof white jumpsuits) 등을 동원해서 만든 보호복을 입었다. (이에 상응하는 영국 시위대의 명칭은 웜블(WOMBLE)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부대가 출동을 해서 의상의 도움으로 부상이나 체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경찰 바리케이드를
뚫고 전진하는 걸 보면, 그 우스꽝스러운 복장 덕분에 시위대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기형적이고 볼품없고 바보 같아서
파괴할 수 없는 만화캐릭터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만약 이렇게 분장한 캐릭터 부대가 경찰에게 물풍선을 던지고 물총을
쏜다든가, 혹은 프라하 등지에 등장했던 '핑크 블록'들처럼 요정 분장을 하고 깃털로 만든 먼지털이를 들고 경찰들에게 간지럼을 태우거나 하면 그 효과는 백배 증가한다.
미전당대회 때는, 우스꽝스러운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억만장자 분장을 한 '부시 (또는 고어)를 위한 억만장자들(Billionaires for Bush)'라는 시위대는, 시민들의 반대를 잘 억눌러준 경찰들에게 보답의 의미로 가짜 돈뭉치를 찔러 넣어 주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이 날의 시위에선 경미한 부상을 입은 사람조차 하나
없었다. 어쩌면 경찰들은 평소에 턱시도 입은 사람은 때려선 안 된다는 혐오 요법 같은 거라도 받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에 혁명적 아나키스트 광대 블록(Revolutionary Anarchist Clown Bloc)은 서커스에서 사용되는 큰 바퀴
자전거를 타고, 무지개빛 가발을 쓰고 뿅망치를 들고 나타나서 서로를 (혹은 억만장자 분장을 한 시위대를) 공격하는 시늉을 해 경찰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발한 구호란 구호들은 그날 다 나왔다.
'민주주의? 하하하!' '단결된 피자 연합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헤이 호, 헤이 호-하하 히히!' 부터 메타 구호(meta-chant)인 ‘호출! 응답! 호출! 응답! !’ —그리고 모든 이들이 가장 좋아했던—‘세 글자 구호! 세 글자 구호 !’까지 각양각색의 구호가 등장했다.
퀘벡시에서는 -창조적인 시대착오적 발상 협회 (Society for Creative Anachronism)의 좌파 지도부의
도움으로- 중세시대 군인들처럼 전열을 갖추고 거대한 투석기를 설치해 FTAA를 향해 말랑말랑한 장난감을 쏘기도 했다. 비폭력이면서도
전투적인/공격적인 대치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고대의 전투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퀘벡시에는 페르타시스와 호플리테스가 등장하는가 하면 (전자는 주로 에드워드 섬 출신, 후자는 몬트리올 출신들이었다), 로마식 방패벽을 만드는 방법까지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리케이드가 거의 하나의 예술양식이 되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뜨개실
몇 가닥으로 교차로에 거대한 거미줄을 치면 심지어 경찰 오토바이마저 파리처럼 걸려서 옴짝달싹 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걸 뚫고 가로질러
간다는 건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해방 인형(Liberation Puppet)의 양팔을 벌려 사차선 도로를 막기도 했고, 기차놀이 행렬은 움직이는 바리케이드가 되었다. 지난 메이데이 집회에서는 '런던의
반군들(Rebels in London)'이 시내 곳곳을 거대한 모노폴리 게임판처럼 이용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메이페어에 빈민들을 위한 호텔 짓기, 옥스퍼드 가에서 '세일 오브 더 센추리' 게임쇼 개최하기, 게릴라 가드닝 등의 시위를 했다. 갑작스런 폭우와 경찰력 동원으로 다소 방해를 받긴 했지만, 이 날의 시위는 전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 가장
전투적인 활동가들조차도 -이를테면, 지구해방전선(Earth Liberation Front)의 과격파 환경주의자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관습적인 범주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새로운
시위형태가 '질서의 수호자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사태를
자신들에게 익숙한 영역으로 -즉, 단순 폭력- 끌어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 절박함이 극단으로 치닫다 보니 결국 이탈리아
제노바에선 폭력진압을 할 만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파시스트 훌리건들에게 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형태의 행동의 기원을 60년대 미국의 이피족이나 이탈리아의 '메트로폴리탄
인디언'이 벌인
게릴라 연극이나 돌발행동으로, 7,8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무단점거자(squatter) 전투로, 심지어는
도쿄 공항 확장에 반대한 농민저항운동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 부분에서도 결정적인 기원은 남반구에서 일어났던 사파티스타 운동을 비롯한 다른 운동들에 있는 듯하다. 여러 측면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비폭력
시민저항의 권리마저 박탈당했던 민중들이, 신자유주의체제가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저지른 짓들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시민 사회'에
권력이 귀속되도록 하기 위해서 했던 새로운 시도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그 사령관들이 말하듯 더 이상 군대가 아니기를 열망하는
군대다. (이들이 -최소한 지난 5년동안은- 진짜 총을 아예 소지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나 마찬가지다.)
게릴라전 기본전술로부터의 방향전환에 대해 부사령관 마르코스 자신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우리의 투쟁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이런 두 가지 방식 중 그 어느 쪽으로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든 사람들, 수천, 수만의,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봉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가 전멸되는 것 역시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계획을 전면수정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사파티스타주의, 신-사파티스타주의를 규정하게 했다.
이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수백 명의 반군들이 비무장 상태로 멕시코군의 기지에 엄습해 주둔군에게 큰 소리로 항의를 하고
수치심을 알게 하려고 '침입'을 조직하는 군대가 되었다. 브라질의 '토지없는 노동자의 운동(Landless Workers'
Movement)' 역시, 사용되지 않는 땅을 완전히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재점거하는 대규모 행동을 통해 엄청난 도덕적 권위를
획득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20년 전에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시위나 전투를 벌였다면, 다만 총알받이나 되고 끝났을 것이 분명하다.
아나키와 평화
그 기원을 무엇으로 잡든, 이 새로운 전술들은 세계화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던 전반적인 아나키즘적 착상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왜냐면 아나키즘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보다는, 지배의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비합법화하고 해체하면서 최대의 자율성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오직 평화가 일반화된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이 시점에서 투쟁의 성패를 궁극적으로 결정하고, 어쩌면 21세기 전체의 방향까지도 결정짓는 건
바로 이 점이 될 것 같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맑스주의 정당들이 빠른 속도로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로 변해갈 때에도,
혁명적 좌파의 중심에는 여전히 아나키즘과
아나코 생디칼리즘이 있었다. 정말로 상황이
일변했던 건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워온 바에 따르면, 볼셰비키의 성공과 더불어 -스페인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아나키즘이 쇠퇴하고 공산주의가 일약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걸 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 같다.
19세기 말엔 대부분 사람들이, 산업화된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이란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식민지 확장은 계속되었지만,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혹은 프랑스와 영국 본토에서 벌이는 전쟁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1900년에 이르면 여권의 사용조차도 낡아빠진 야만적 관행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짧았던 20세기'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한 세기 전체를 전쟁을 수행중이거나 전쟁을 준비하는 데 바쳤던,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을 것이다. 정치적 유효성을 측정하는 궁극적 수단이 거대하고 기계화된 살인기계를 유지하는 능력에
달렸던 시대에, 아나키즘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나키스트는 정의상 그런 부분에 대해선 (그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유능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데 너무나 유능했던 맑스주의 정당이, 상대적으로 아주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 역시 의외의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산업화된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이 다시 한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자, 아나키즘은 19세기 말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좌파의 심장부에 놓인 국제적 운동으로서 재등장했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현재의 '반-테러리스트' 동원에 어떤 문제가 걸려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단기적으로 보면 상황은 매우 위협적이다. 9.11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이미 우리-아나키스트-들이 곧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려고 골몰하던 정부는
마침내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었다. 그 결과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엄청난 억압을 당하게 되리라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인류가 20세기에 보여준 수준의 폭력으로 되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9.11 사태가 일어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이는 어마어마하게 야심적인 테러 계획이 실제로 성공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던 셈이다), 핵무기가 점점 확산되어감에 따라 실리적인 목적
때문에라도 지구상의 점점 더 많은 지역들에서 전통적 형태의 전쟁을 벌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만약 국가의 건전한
상태라면, 아나키스트식 조직화의 전망은 한층 더 밝을 수밖에 없다.
직접민주주의의 실천
진보언론은 세계화운동이 비록 전술적 측면에서는 화려하지만 중심적 주제나 일관된 이념이 없다는 논지로 끊임없이 불평을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 아나키스트들을, 아무런 관련도 없는 명분들을 중구난방으로 외쳐대는 멍청한 어린애들 취급이나 하는 (우익)
미디어기업식 비판의 좌익언론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미아를 석방하라,
(국가)부채를 탕감하라, 오래된 삼림을 보호하라 등의 주장을 하는 운동이 모두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또 흔하게 받는 공격 중 하나는 이 운동이 어떤 형태의 구조나
조직을 막론하고, 조직이라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본다는 것이다. 시애틀 이후 2년이나 흐른 이 시점에도 여전히 이런 걸 해명하는 글을 써야만 한다는 건
비통한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이 세계화 운동은, 북미 지역에서는 특히, 민주주의를 새롭게 발명하기 위한 운동이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조직을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창조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이념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창조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곧 이 운동의 이념이다. 그것은 국가, 정당, 기업과 같은 상명하달식 구조를 대신할,
탈중심화되고, 비위계적인 합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기반한 수평적 네트워크를 창조하고 성립하려는 운동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이상의 것을 열망한다. 왜냐면 궁극적으로는 일상적인 삶 전체를 다시 발명해내는 것을 염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주의의 많은
다른 형태들과는 달리, 이 운동은 맨 처음 정치적 영역에서 자신을 조직화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바로 그 영역이
권력자들이 (경제영역에다 자신들의 모든 지원사격을 쏟아붓느라)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십 년동안 북미지역의 활동가들은 자기 집단 내부의 여러 절차나 과정을 발명하는 데 엄청난 창조적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 직접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할 때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실행가능한 모델을
창조해내려고 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구 전통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례들에 많이 의존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다수결보다는 합의점을 모색하는 과정에 의거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얻은 것이 조직화에 이용할 수 있는 풍부한 도구들이었다. (대변인협의회(spokescouncil), 친연집단(affinity group), 촉진 수단(facilitation
tools), 일시해산(break-out), 어항(fishbowl), 우려의 차단(blocking concern), 분위기
감지자(vibe-watcher) 등등.) 이것은 모두 반대의견을 억누른다거나, 지도자의 위치를 고정시킨다거나, 자유의지에 의해 동의하지 않은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아래로부터 발의하고 가장 효과적인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민주적 형식을 창조해내기 위해 고안되고 시도된 것들이었다.
합의 과정의 기본적 구상은, 투표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제안을 제시하는 것, 그게 무리라면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필사적으로 거부하진 않을 정도의 제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제안을 발언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 '우려되는 점(concern)'이 있는지 물어보고 그 문제를 함께 검토한다.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우호적인
수정안'을 제안해서 원래의 제안에 덧붙이거나 그 제안을 고쳐서, 우려되는 점을 반드시 검토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의를 요청하는데, 이때 '차단(block)'하거나 '비켜서(stand aside)'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다.
'비켜서기'란 '난 이번 제안에 동참할 의사는 없지만, 참여하고 싶은 사람을 말리진 않겠다'는 의사표현이다. '차단'은 '난 이번
제안은 우리가 집단을 통해 함께 하려는 원칙이나 목적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고 생각한다.'는 말과 같다. 차단이란 거부권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차단을 할 경우엔 제안 자체가 무효화될 수 있다. 물론 차단 자체가 순수하게 원칙에 입각한 것인지를
논쟁할 방법 역시 존재한다.
이 운동의 조직에는 여러 종류의 집단들이 있다. 대변인협의회(spokescouncil)는 작은 단위의 '친연집단'들을 조율하는
의회다. 이런 의회는 시애틀이나 퀘벡에서 했던 것 같은 대규모 직접행동 전(前)이나 그것이 전개되는 기간 중에 열린다.
(4-20명 규모로 구성된) 각각의 친연집단이 한 사람의 '대변인(spoke)'을 선정하면, 그 사람은 더 큰 집회에 가서 자기
집단 모두를 대신해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대변인만이 전체 협의회의 실질적인 합의 모색 과정에 참여할 수 있지만, 중대한
사안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엔 다시 친연집단 단위로 흩어져 대변인이 취할 입장에 대한 집단 내 합의점을 찾는다. (절차가 상당히
번거로운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해 보면 그렇게 번거롭진 않다.) 반대로 일시해산(break-out)은 대규모 회의에서
일시적으로 작은 집단들로 쪼개져 결정을 내리거나 제안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춰서, 나중에 전체 회의 때 다시 모여 최종적으로
결정사안을 승인받게 된다. 촉진도구(facilitation tools)는 상황이 너무 늘어진다 싶을 때, 문제를 해소하고 일을 진척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해선 안 되고 각자 의견을 제시할 수만 있는 '브레인스톰(brainstorm)' 시간을 갖자고 요청한다든가, 구속력
없는 거수투표(straw poll)를 해서 제시된 제안에 대해 대강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해 본다든가 할 수 있다.
'어항(fishbowl)'은 극심한 의견 차이가 있을 때만 사용하는 것인데, 일단 찬반 양편에서 각각 여자 1명, 남자 1명씩을
대표로 선발한다. 그런 다음에 이들 네 사람만 가운데에 앉히고 나머지는 모두 아무 말 하지 않고 둘러 앉아서, 이들이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런 다음에 이들이 도달한 타협안이 전체에게 제안으로서 제시될 수 있다.
구상하는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앞서 언급한 것은 물론 여전히 진행 중인 작업이고, 이런 종류의 경험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 안에서 민주주의의 문화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당연히 넘어지고 깨지는 시행착오 가운데서 이루어내야 하는, 고통스럽고 순탄치 않은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리에서 우리들과
대치해야 했던 경찰들 중 누구를 데려다 증언하게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직접 민주주의가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점에 대해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직접 행동에 온전히 동참했던 사람치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바뀌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말로 하는 것과, 아주 잠깐동안이나마 그것을 경험하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조직
-일례로 직접행동 네트워크(Direct Action Network)- 을 상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분파주의 맑시스트, 또는
분파주의 아나키스트 집단과 정반대의 집단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집권주의적
민주주의 '정당'은 완벽하고 정확한 이론적 분석에 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이념적 획일성을 요구하고, 평등주의적 미래의 비전을
극단적으로 권위주의적인 현재의 조직형태와 병치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조직들은 터놓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토론은 항상 구체적 행동방침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자기 관점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전향시키지 않은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좌우명이란 게 있다면 '바로 지금 아나키스트로서 행동할 의향이 있다면, 당신의 장기적 비전은 뭐가 됐든
당신 문제다.'라고 집약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분별있는 생각이다. 언급했던 원칙들이 어느 범위까지 유효할지, 그런
원칙들에 입각한 복합적인 사회가 어떤 모양새를 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은 그러므로 그들의
실천의 기저를 이루는 반권위주의적 원칙들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명시적인 그런 원칙들 중 하나가 곧 자신들의 이념과 실천, 원칙은 계속
그런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소외의 문제에 관해 직접행동을 하는 네트워크 집단들이 제기한 질문들 몇 가지를 정리하고, 그것이 정치적 실천에 미치는 폭넓은 함의를 짚고
넘어가겠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처럼 혁명정치의 지지기반이 전무하다 싶을 때조차, 혁명의 기획에 대해 가장 호의적인 집단은 예술가, 음악가, 작가, 그 외 비소외 생산에 관여하는 사람들인 걸까?
먼저 뭔가를 상상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실현시키는 실제적 경험과, 사회적 대안을 -특히 덜 소외된
형태의 창조성을 전제로 한 사회의 가능성을- 마음 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능력 사이에는 당연히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겠지?
심지어 '혁명적 연합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지 않은 자와 가장 억압받는 자 사이의 동맹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제안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실제 혁명은 이 두 범주가 가장 넓게 중첩됐을 때 일어난다고 할 수도 있겠지?
이 질문들은 최소한, 어째서 수 세대에 걸쳐 임금 노동에 단련된 계층이 아니라, 농민과 장인들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롭게 프롤레타리아화된 전직 농민과 장인들이- 거의 항상 자본주의 정권을
전복했는지, 그 이유라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새로운 운동에서 원주민들이 갖는 엄청난 의미도 해명해 준다. 왜냐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소외되지 않은 동시에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역 단위의 저항이나 봉기는 물론,
세계 규모의 혁명적 동맹에도 이들 가장 소외되지 않은 동시에 가장 억압받는 자들도 포함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들이 뭔가 촉발제 역할을 하는 것은 이젠 거의 필연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