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을 할 권리로부터의 소외에 관하여[각주:1]
교육이란 건, 그 효과를 최대한 누리고, 공부 열심히 하고, 숙제 할 거 하고 똑똑해지려고 노력하면, 잘 살게 돼 있다. 근데 만약 그러지 못하면, 이라크에 가서 박혀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각주:3]
-국회의원 존 케리 (민주당, 매사추세츠 주)
케리는 이라크에 파병 중인 수천 명의 미군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그들은 교육상 무슨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애국자이기 때문에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존 맥케인 (공화당, 아리조나)
중간 선거 이후, 공화당이 붙든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은 케리 의원이 던진 서툰 농담 한 마디였다. 물론 그의 농담은 조지 부시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화당에서는 마치 케리 의원이 '학교에서 짤린 애들이나 군대에 간다'고 말한 것처럼 이를 비틀어 놓아 버렸다. 이는 정말
너무나 기만적인 태도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케리가 그런 발언을 한 진짜 의도는 미국의 대통령이 그다지 똑똑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파들은 피비린내를 맡았다.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 홈페이지에 한 블로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케리 같은 '먹물/뺀질이 관료'[각주:4]들의 문제는 이라크에 파병된 군인들이 자기가 맡은 임무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굳이 그걸 부정해야만 했다)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기회를 박탈한 체제 때문에 그곳에 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우리는 -2004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선거 날 인정사정 보지 않고 그런 자들을 혼쭐 내줄 필요가
있다. 왜냐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선거에서 패배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왜냐면 대다수 미국인 스스로가 그 이른바 임무에 대해 별로 사명감이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은
그 임무란 게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던져봐야 할 질문은 이것인 것 같다.
"민주당은 대체 왜 이 대대적인 군사적 참사를 겪은 끝에야 (케리 의원을 통해 전형화된 '동북부'의 엘리트라는 이미지로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동일시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전략적으로 그러기도 했겠지만) 정치적 황무지[각주:5]에서 겨우 벗어날 생각을 한 것일까?" 달리 표현하자면, 왜 공화당의 이 전략/입장은 그토록 큰 효과를 얻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선, 대부분의 논평자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숙하게 미국 사회의 본성을 파헤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현안들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리기 일쑤다. 이를테면, 애국심 vs. 기회, '가치관' vs. 직업,
교육 등의 '기본 현안' . 그러나 난 문제를 이렇게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우파들의 방식에 놀아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군에 입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회가 박탈되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할 기회?
이
질문에 대한 인류학적 관점을 하나 제시해 보겠다. 한,두 해 전쯤, 해외 미군기지 관련 연구를 하던 브라운 대학 출신의 동료
인류학자 캐서린 러츠(Catherine Lutz)의 강의를 듣다가 문득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 해외 기지에서는
군인들이 파병지역의 학교 시설을 수리하거나 무상으로 치과진료를 제공하는 등 여러 형태의 지역 지원활동에 참여할 것을 장려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지역민들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군인들에게도 최소한의 정신적 효과가
있다. 우리는 군인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제가 군에 자원한 것입니다."라거나 "군에 복무한다는 것은 단지 제 나라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할 때, 희열에 차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군에서 직접 실시한
설문조사 통계자료 역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물론 군에서 실시한 설문지에 군입대 동기를 묻는 문항에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는 답변항목은 없다. 그러나 군인들은 주어진 항목 가운데서는 가장 고귀한 명분이라 할 수 있는, "뭔가 자랑스러운 일을 하는 것"을 가장
많이 택한다.
그렇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 안달난 이타주의자들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것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정의하는 통상적인 방식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우리의 사고가 통상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즉각적인 냉소주의에 가깝다. 세계는 거대한 시장이고, 사람들은 모두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버둥대고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건이 벌어진 이유를 알고 싶다면, 일단 누가 그로 인해 득을 보는지를 물어라. 지하조직의 밀실에서나 오고갈
법한 이런 질문들이 첨단의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곳에서도 똑같이 던져진다. 이런 시각에서 미국이 세계에 기여하는 바를
바라볼 때 대개 "합리적 선택" 이론[각주:6]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 이론은 '모든 인간 행위는
경제적인 계산에서 비롯된다'거나, '합리적 행위자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행위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대부분 학문 분과에서도 이타주의적 행위란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취급되었고, 경제학자로부터 진화생물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자들이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면 명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꿀벌들은 왜 자신들의 벌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가?' 혹은 '사람들은 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도 공공장소에서 문을 붙잡아 열어주거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인가?'라는 미스테리를
해명하면 곧 유명해지는 것이다. 동시에 앞서 언급했던 미군 기지의 사례들은 미국인들, 특히 빈곤 계층 출신의 사람들은 세상에 선행을
베풀고 싶은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린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기부'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관대한
기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입이 적은 사람들일수록 그들의 수입 대비 기부금 비율이 높다. 자신이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것에
대해 훨씬 더 후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패턴은 중산층과 부유층을 비교한 데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2003년의 소득세 신고에
관한 한 연구는 만약 최고 부유층
가정에서 보통의 중산층 가정만큼만 기부를 했다면, 총 기부금 액수는250억 달러가 증가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럴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데도 말이다.) 그런데 기부란 사실 '이타적
행위'라는 전체영역 중에서는 아주 미미한 부분만을 차지할 뿐이란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연구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전형적 미국인의 수입 사용 내역을 분석해 본다면, 그 중 많은 부분이 선물이라든가 여행, 파티, 동네 소프트볼 게임에서
나눠먹는 6캔들이 맥주 등의 형식으로 아이들에게 쓰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즉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종류의 나눔이 기쁨/즐거움의 진정한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대체 아무리 비싼
레스토랑에서 맛난 음식을 먹는대도 혼자만 가서 먹으라고 하면, 좋아라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이는 전체 논지의
절반에
불과하다. 심지어 자신만을 위한 사치조차도 일종의 선물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 유사하게, 자기 아이를 특별한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돈을 쏟아붓는 것은 이타성 때문이라기보다 출세를 위한 것이라고 반박할 이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의 실제적 과정 전체를 들여다 본다면, 이런 행위가 동일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젊은 이상주의자들이 가족을 꾸리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이기심과 탐욕에 기반한 사회와 마침내 타협을 했던가?
그런데 만약
이타주의가 인간의 원초적 동기라고 가정해본다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세계 전체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는 욕망을 버리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 아이들을 위해 옳을 일을 하려는 더욱 강한 욕망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것뿐이다.
이
사실이 내게 시사하는 바는, 미국 사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천재적인 사회 공학자(social engineer)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잠깐 동안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이 공학자가 인간 본성에 관한 어떤 가정들을 갖고 작업을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까? '합리적
선택' 이론은 물론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이 사회 공학자는 사람들을 노동과 시장의 -다시 말해, 정신을 마비시키는 노동과 치열한 시장
경쟁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자기 아이들에게 맘껏 쓰고, 친구들에게 맥주도 실컷 사
줄 수 있으며, 혹시 대박까지 난다면, 자신의 여생동안 박물관에 기부를 하거나 아프리카 국가들 같은 가난한 나라에 에이즈 치료약을
공급하는 일을 하며 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론가들은 이런 외양을 끊임없이 벗겨내고,
그러한 이타적 행위의 이면에는 사실상 어떤 이기적 전략이 숨겨져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미국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곳을 이타적 행위를 할 권리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타성, 혹은 최소한
좀더 고귀한 행위에 투신하기 위한 권리,는 전략이 아니다. 그것이 곧 상이다.
이런 관점은 최소한, 어떻게 최근 몇 년동안 우파가 좌파보다 대중주의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데 성공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평범한 미국인들로 하여금 선행을 할 기회를 박탈해 왔다'는 논리로 진보주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그에
성공했다. 몇 가지 명제를 통해 내 논의를 좀 더 보충해서 설명해 보겠다.
명제 1: 이기주의나 이타주의, 그 어느 것도 자연적 욕구는 아니다. 그 둘은 서로간의 상관관계 속에서 발생하며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시장 없이는 배태될 수 없다.
우선, 나는 이기주의나 이타주의 그 어느 것도 인간의 본성에 그 자체로 내재되어 있다고 믿진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인간의 동기는 그처럼 단순한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이기주의나 이타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해 갖는 우리의 관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 둘은 서로에 대한 대응이나 반응으로써 발생했다. 고대 사회를 예로 들어 보자면, 일반적으로 돈과 시장이 등장하기 시작한 그 시점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세계 종교들도 같이 탄생했다. 누군가 어떤 공간을 점유하여 "여기서 당신은 오직 물질적인
것들과 자기자신을 얻는 데만 집중해야 한다."라고 말할 경우, 곧 다른 누군가가 대항적 공간을 점유해 "그래,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자아라든가 물질적인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숙고해야 한다."라고 선언한다고 해도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런 후자의 제도나 체제들을 통해 '자선'이라는 현대적 관념이 처음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시장이나 종교의 영역 바깥에서 활동할 때는, 고삐 풀린 탐욕이라든가 완전히 이타적인 관대성에서만 비롯됐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는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가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친구, 친지, 혹은 적과 관계를 맺을 때는 훨씬 더 복잡한
동기들이 한꺼번에 작용할 것이다. 질투심, 유대감, 자만, 자기파괴적 슬픔, 충실성, 낭만적인 집착, 분노, 악의, 수치심,
유쾌함, 함께 즐거움을 공유하리란 기대감, 라이벌에게 무안을 주려는 욕망 등등. 이것들은 인간의 삶의 극적인 순간들을 추동하는
동기들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위대한 소설가들은 그런 것에 영원성을 부여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많은 사회이론가들은
이를 무시하고 넘어갔다. 돈이나 시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그 어떤 곳에 가 보더라도 -예를 들어 뉴기니나 아마존의
특정한 지역-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과 동기의 그물망은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친구이거나 친지이거나
적들인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 가보면, '자기 이익'이나 '이타성' 에 대응하는 어휘는 없는 경우가 많지만, 질투심, 유대감,
자만심을 묘사하는 미묘한 어휘들은 거의 항상 찾아볼 수 있다.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활동 역시 훨씬 더 미묘한 원칙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언뜻 보기에 이국적인 이 '선물의 경제학'에 내재한 역학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연구를 쏟아냈다. '어떤 주요인사가 사촌들과 공모해 속임수를 써서 엄청난 부를 얻어낸 뒤, 단지 상대를
공개적으로
망신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을 적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 만약 우리 눈에 이상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대에 대한
우리의 감정에 기반해서 상대를 대하는 경제적 체제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비인칭적/비인격적
시장에서 행위하는 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파괴하려는 작업은 선교사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다. 근원적으로 그들은 시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래
전에 발생한 세계 종교를 대표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선교사들은 물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이다. 그러나 '영혼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받아들이고 보다 이타적으로 행위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이들은 극소수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이기적인 동시에 더욱 이타적으로 살라고 설득하는 일종의 이율배반을 보여준다.
한편에서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적절한 노동의 규율을 가르치고,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 팔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물질적 삶을
향상시키도록 부추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궁극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하며, 다른 이들에 대한 이타적
헌신과 같은 더 높고 고귀한 행위의 가치에 대해 설교한다.
명제 2: 정치적 우파는 항상 이런 분열을 극대화하면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대변자를 동시에 자처했다. 좌파들은 항상 그 둘 사이의 구분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다.
이 명제가, 미국과 같이 시장 경제가 가장 강하게 발달되고 가장 산업화된 사회가, 어떻게 동시에 가장 종교적인 국가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더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어째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탄생시킨 나라에선 20세기 전반(全般)에 걸쳐, 시장과 종교 양자를 한꺼번에 뿌리뽑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정치적 좌파가 항상 이윤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 경제체제를 창조하거나, 개인에 의존한 자선행위를 공동체적 지원의 형태로 대체하려 하는 등의 노력으로 그 두 가지(시장과 종교,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역자 보충)
사이의 구분을 지우고자 했다면, 우파는 그 구별 위에서 성장해 왔다. 일례로, 미국의 공화당은 자유의지론자와 기독교 우익이라는
두 가지 이념적 계파에 의해 지배된다. 그들은 한 극단에서는 자유시장 근본주의자이자 개인 자유의 수호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말하는 소위 자유라는 것이 소비자로서의 선택의 자유에 국한돼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그들은, 축자적인 다양성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 대부분의 개인의 자유에 관해서는 미심쩍은 태도를 취하고, 오로지 성서의 명령, '가족적인
가치', 자선 행위 등에 대해서만 열성적이다. 이들을 얼핏 한 번 보게 되면, 이런 식의 연합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에 일단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공화당 내부에도 항상 지속적인 긴장이 있다. 낙태 문제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실상
대부분의 우익 연합은 이런 형태의 변주들이다. 우파의 접근 방식이란, 시장의 개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모든 전통적 진리들을
혼란에 빠뜨린 뒤에, 이 혼란과 불안의 가운데서, 자기 손으로 고삐를 풀어놓은 야만인들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질서와 위계의
수호자로, 교회와 아버지의 권위의 충직한 옹호자로 바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사기일지는 몰라도, 대단히 효과적이긴 하다. 그 결과
마치
우파만이 가치에 대한 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거뒀다. 그래서 우파는 분리의 양극단, 극단적 이기주의와 극단적 이타주의의
모든 입장을 취하는 데 어쨌든 성공한다.
잠시 '가치'라는 말을 한 번 생각해 보자. 경제학자들이 가치를 말할 때
실제로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돈 (혹은 교환가치: 역자 보충)
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으로 측정하는 어떤 대상이다. 또는
경제적 행위자들이 추구한다고 가정된 그 어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면, 우리는 돈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노동을 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지 않을 때, 혹은 돈을 얻기 위한 욕망을 제외한 다른 무언가에 의해
추동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갑자기 '가치관'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중 가장 흔히 들먹이는
건 물론 '가족적 가치(관)'이다.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닌 것이, 대부분 산업 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무보수 노동이 육아와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적 가치관, 정치적 가치관, 혹은 예술이나
애국심에 대해 취하는 가치관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농구팀에 대한 애정조차 애국심의 일종이라 말할 것이다.
-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시장에 의해 변질되지 않은, 혹은 변질되지 않아야만 하는 헌신이라 말해진다. 동시에 그것은
전적으로
고유한 것이라 말해진다. 돈이 모든 것을 비교의 대상으로 만드는 반면, 아름다움, 헌신, 진실성 등의 가치는 정의상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몇 그램의 진실성을 헌신하는 것이 옳은지, 가족에 대한 책임과 신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얼만큼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등을 계산해 주는 수학 공식 따위는 없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타협을 항상 하긴 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분명 계산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가치란 것이 단순히 누군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이라면, 돈은 그 중요성에 유동적 형태를 부여해 준다. 그래서 중요성의
정확한
양을 측정해서 다른 중요성과 교환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준다. 만약 누군가가 엄청난 양의 돈을 축적한다면, 그 사람은 우선 그걸
뭔가 고유한 것으로 전환하려 할 것이다. 그 고유한 뭔가가 모네의
<수련>이 될지, 우승용 경주마가 될지, 기부금을 주고 얻은 대학 학장 자리[각주:7]가 될지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시장 경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교환을 가능케 하는 능력, 즉 '가치'를 '가치관(values)'
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우리를 헌신할 수 있는 위치에
가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성공할 때는, 곧 그들이 그 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을 때이다. 예를 들어
케네디가가 궁극적인 민주당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로 미국에 건너와 엄청난 돈을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궁극적으로 그 돈을 고귀함(nobility)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명제 3: 미국 좌파들의 진짜 문제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가치와 가치관 사이의 구별을 지우려 한다면서, 실은 대부분 자기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한다는 점에 있다. 이 점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파가 자신들을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자처하면서 나설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이다.
이
명제는 미국의 좌파가 왜 그렇게 엉망이 됐는지를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가치와 가치관
사이의 차이를 지우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거나 전자로부터 후자로 넘어갈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하기는 커녕, 진보주의자들은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대선 이후, 진보 진영 내에서 일어난 큰 논쟁의 쟁점은 그들이 제시했던
경제적 현안들이 소위 '문화 전쟁'이라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느냐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민주당은 그럴 듯한 경제적
대안을 내놓지 못해 대선에서 진 것인가? 아니면 동성애 결혼 문제를 놓고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을 성공적으로 결집시켰기
때문에 공화당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인가? 라는 것이 그들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질문을 이렇게밖에 구성하지 못한다는, 바로 이런 사실이 곧 좌파들이 우파의
분석 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미국의 실제적인 작동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조지 부시가 대중들에게 어필했던 -최소한 최근까지는 통했던- 기이한 방식을 통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좀더 설명해 보겠다.
2004년 대선이 끝난 뒤, 미국의 대다수 진보주의 지식인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수조차 없었다. 선거가 끝난
뒤 많은 이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던 것은, 그들이 부시에 대해 가장 혐오했던 점이 바로 대다수 미국인들이 부시를 좋아하게 만든
점이었던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TV 토론회를 예로 들어 보자. 만약 통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있다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은 조지
부시와 존 케리가 한판 붙는 것을 본 뒤에 케리가 이겼다고 결론짓고는, 가서 부시에게 투표를 한 셈이다. 그러므로 그 사태는 결국
케리의 달변, 즉 언어와 논리 구사 능력이 결국 그에게 역효과로 작용했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 사실은 진보주의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그들은 어떻게 결단성 있는 지도력과 멍청이 같은 짓거리가 등치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 최고의 엘리트 가문 출신에다 앤도버, 예일, 하버드 대학을 나와서, 자기만족에 빠진
이죽거리는 표정이 트레이드마크인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대중/서민을 위한 정치가'라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 역시도 그 문제로 상당히 고민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겠다. 노동계급 출신의 부모님 슬하에서
1970년대에 장학금을 받아 앤도버에 입학하고, 마침내 예일 대학에 취직했던 나는 온몸 구석구석에서 자기만족적인 특권의식을
뿜어내는
부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내 인생의 상당 기간을 보냈다. 그러나 사실 나 같은 사람 -학문적 성취를 통해 극적인 계급
상승을 이룬 경우- 의 이야기는 미국 내에선 극히 드물다.
미국은 물론 계속해서 스스로를 기회의 땅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이티나 방글라데시 이민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무제한적인 계급 상승의 약속 위에 이룩된 나라다.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의 조건이란 한 가정이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가는 일종의 중간기착지처럼 여겨졌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의 민주주의는 영속적인 임금 노동자들이 부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가능케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링컨 시대의 이상이란, 임금 노동자가 충분히 돈을 모아 더 나은 인생을 꾸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건 대단한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땅을 좀 사서 서부 개척지에서 자영 농민이라도 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논점은 이런 이상이 얼마나 (현실에) 제대로 들어맞았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대다수 미국인들이 이 이미지를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길이 조금이라도 막혔다 싶으면 엄청난 동요가 뒤따랐다. 개척지를 폐쇄하자 격렬한 노동 투쟁이 일어났고,
그리고 20세기 전반에 걸쳐, 빠른 속도로, 그러면서도 꾸준하게 이루어진 미국의 대학 제도 확장은 그에 대한 대체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2차대전 이후, 고등교육 제도의 확장을 위해 어마어마한 물량과 자원이 투여되면서 그것은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이런 확장은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사회적 유동성의 수단으로서 홍보되었다. 이는 냉전 시대에는 일종의 암묵적인 사회 계약처럼
이용되면서, 노동 계급들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은 더 이상 노동계급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가능성까지도 시사했다. 문제는 물론, 고등교육 제도가 영원히 확장될 수는 없었다는 데 있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이 획득한
자격에 근접한 직업은 구할 수조차 없고, 그런 상황에 대해 불만은 쌓일 대로 쌓인 데다, 진보적 사유의 역사 전체에 접근할 지성을 갖춘
인구가, 상당수에 이르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대학 제도의 확장이 마침내 막다른 길에 다다랐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예상되었던
결과지만, 캠퍼스는 폭발하기에 이른다.
뒤따른 것은 일종의 합의금 지급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캠퍼스 내 급진파들은 대학으로 재흡수되었지만, 대부분 엘리트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데 투입되었다. 그러면서 교육 비용이 폭등하자 재정지원은 줄었고, 교육 -무엇보다 인문학 교육- 을 통한 계급
상승의 가능성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70년대까지는 꾸준히 증가세였던 주요 대학내 노동계급 출신 학생의 숫자는 몇 십 년 동안
줄곧 감소하기만 했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건, 바로 이런 '전반적인' 감소세가 기존에는 배제되었던 특정 그룹의 사람들을 대학에서 마침내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었다. (제대군인원호법[각주:8]은 사실상 백인 남성에게만 적용된 것이었다.) 마침내 특혜를 받게 된 이들은 80, 90년대에 캠퍼스의 '정체성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에서 환영받고 찬양받던 이들이었다. 이런 포용성이 침례교도들이나
'레드넥'[각주:9]들에게까지 확장되진 않았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많은 사람들의 분노는 정부나 대학 당국에게 향하지 않았고, 소수자, 동성애자, 페미니스트들에게 향했다.
부시에게 투표한 노동계급들은 도대체 왜 부유층들보다 지식인들에게 더 큰 불만을 갖고 있었을까? 내게 그 답은 단순해 보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은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아이들조차도 지식인이 된다는 건
그들로서는
거의 상상 불가능한 영역이나 다름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는 그다지 비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다. 네브라스카 출신의 어떤 정비공은
자기
아들이나 딸이 엔론(Enron)[각주:10]사의 경영진이 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아이가, 제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국제 인권 변호사가 되거나 뉴욕 타임즈 연극 비평가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을 거론할 때는, 고등 교육의 가능성이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사실상 그런 직업을 택하기 위해선 무상으로 일을 하다시피 하는 인턴쉽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국 내에서 수입 이외의 동기 때문에 직업을 선택할 경우에, 처음 한, 두 해 일할 동안은 수입이 전혀
없으리라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이는 이타주의적인 동기를 추구할 경우, 이를 테면, 자선단체나 NGO, 혹은 정치적 활동가가
되겠다고 할 경우는 두말 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일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이나 진리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여,
책에 파묻혀 살고 싶다거나 예술 세계의 일원이 되고, 비리를 파헤치는 취재 기자가 되고 싶을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관습은 인문학 교육을
받은 가난한 학생으로 하여금 그런 길은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도록 확실하게 길을 봉쇄해 버린다. 이런 종류의 배제의 구조는 물론 항상
-특히 정상급에서는- 존재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담장은 아예 요새로 바뀌어 버렸다.
만약 정비공의 딸이 보다 높고, 보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추구한다면,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대체
무엇일까? 생각컨대, 딱 두 가지일 것이다. 지역 교회에서 일을 하는 것. (그러나 이것도 그리 만만친 않다.) 그렇지 않다면 군에
입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고귀함(nobility)의 비밀이다. 고귀해진다는 것은 관대해지고, 고결한 정신을 갖추고, 이타주의적으로 살아가며, 고귀한 형태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돈 걱정을 별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군인들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치과진료를 해줄 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선행을 베풀기 위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진 않을 정도로) 돈을 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1960년대 이후 대학들에서 일어난 일들, 앞서
언급했던 "합의금"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학내 급진파들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가치와 가치관을 나누는 경계가 없어진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나섰다. 그것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은 일종의 보상금을 받은 셈이었다.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덕과 진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 주어진 범위에서나마, 대학의 체제를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특권을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줄 수 있는 특권 또한 얻은 것이었다. 그들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들을 욕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 그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 역시 비난할 수 없다. 그들이 (지식인) 프로젝트를 거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항상 말하지만 그거야말로 미국을 미국이게끔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각주:11] 내가 평화주의 운동이나 신병 모집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에게 항상 질문하는 것이지만 '노동계급 출신의 자녀들이 왜 군대에
자원하는지 아는가?' 왜냐면 다른 모든 십대들처럼 그들도 지리한 노동과 의미없는 소비주의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뭔가
진정으로 고귀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면서 모험을 하고 동지애를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이 군대에 자원하는 건, 바로
당신들처럼 (지식인, 활동가: 역자 보충) 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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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원본 링크: Harper's Magazine, January 2007. (유료 구독 신청 후 읽기 가능)
영문본 링크: Sleepy Kid (직접 타이핑해서 올린 이 사람 개인 블로그. 노력이 가상하긴 하나 오타 작렬. 심지어 데이빗 그레이버가 직접 방문해서 오타 지적해 준 댓글도 달려 있음^^)
- 이 글은 Harper's Magazine 2007년 1월호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원제는 "Army of Altruists: On the alienated right to do good"이다. 번역상 약간 애매했던 부분은 본문에 밑줄 표시를 하고 각주에 원문을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원문을 보고 싶은 사람은 마지막에 링크 해 놓았으니 참고할 것. 그리고 이 글에 달린 주석은 모두 역자주임을 밝혀둔다. [본문으로]
- 데이빗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뉴욕 태생이며, 현재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사회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인류학자이자 활동가이다. 번역된 그의 저서로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그린비, 2009)가 있다. [본문으로]
- You know, education, if you make the most of it, you study hard, you do your homework and you make an effort to be smart, you can do welt. If you don’t, you get stuck in Iraq. [본문으로]
- 원문은 'aristo-slacker'라는 조어. [본문으로]
- 원문은 political wilderness. [본문으로]
- 원문은 rational choice theory. [본문으로]
- 원문은 an endowed chair at a university. [본문으로]
- GI Bill of Rights: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을 대상으로 만들었던 법. 2차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에게 제대 후 대학 교육이나 직업 교육, 1년간의 실업수당 제공, 혹은 집을 사거나 사업을 시작할 자금을 대출해주는 등의 특혜를 베풀어주도록 한 법안. [본문으로]
- rednecks: (남부의 교양 없는[가난한]) 백인 노동자. [본문으로]
- 텍사 휴스턴에 기반을 둔 미국계 에너지 기업. 포츈(Fortune)지가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 But neither can one blame the rest of the country for hating them for it. Not because they reject the project: as I say, this is what America is all about.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