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
일상, 가장 발견하기 어려운 것
일상이란 것에 맨 처음 접근해 봤을 때, 그것은 우리의 일차적이면서, 가장 잦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일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을 때, 거리에서나 우리의 사적 공간에 있을 때와 같은. 일상이란 그렇다면, 평소의 우리들이다. 이
처음 단계에서는, 일상이란 것을 그에 합당한 진실(truth)이 결여된 것으로 생각해 보자. 그 다음에 우리가 취할 행동은
그것으로 하여금, 위대한 역사적 변화들 가운데에, (경제적, 기술적 변화의) 아래나 (철학과 시, 정치) 위에서 일어나는 생성
내부에, 진실(True)의 다양한 형태들에, 참여하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 될 터이다. 그러다 보면, 문제는 역사를 향해 일상을
여는 것, 혹은 심지어, 일상의 특권화된 영역, 즉 사적 생활을 축소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존재가 철두철미하게 공적인,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소요(effervescence)의 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의
용의자들(suspects)에 관한 법에 대해 평하면서 헤겔은 그 잔인하고 추상적인 위기(exigency)의 시점마다 보편성이 긍정될
때, 모든 특수한 의지와 개별의 사유들은 의심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저 잘 처신한다는 것만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모든
개인은 그 자신을 애매한 존재로 만드는 일련의 반성과 의도들, 다시 말해, 과묵함을 지니고 있다. 혐의를 받는다는 것은 유죄인 것
--그래서 고백을 받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유죄인 자는 판결을 받기 위해, 즉 억압당하고, 그의 자아가 은폐하는 텅 빈
지점의 공허함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명시적으로 무엇이든지 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법과 관계 맺고 있다. 그러나 용의자란
인식되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무상한 존재다. 그는 자신이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숨긴 부분을 통해 국가의 작동을 방해할 뿐
아니라, 기소 내용에 국가의 작동을 끌어들인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배당하는 각각은 용의자지만, 각각의 용의자는 지배하는
자를 기소하고 그가 잘못을 드러낼 준비를 한다. 왜냐하면 지배하는 자란 언젠가는 자신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편성의 외형을 강탈한 특수 의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은, 심지어 법이 의도적으로 혐의를
두고, 존재의 모든 불확정적인 방식--일상의 무관심--을 좇을 때조차도, 항상 법의 명확한 판결로부터 달아나는 용의자 (이며 애매한
자(oblique)로 생각되어야 한다. (용의자: 유죄일 수 없다는 점에서 유죄인 모든 사람, 혹은 그 어떤 사람.)
그러나 새로운 단계에서 비평은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일상의 비평”이라는 것을 확립하면서 썼던 반성의 원칙이라는 의미에서-- 매일매일을 역사와 정치적 삶을 향해 열고자 한다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일상성(Alltaglichkeit)"의 근본적 변화를 준비한다. 눈에 띄는 관점의 변화. 일상이란 더 이상 통계적으로 확립되어
존재하는, 한 사회의 어느 한 시점--평균이 아니다. 그것은, 만약 그것이 없다면 드러난 존재들의 숨겨진 현재나 발견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길을 알 수조차 없게 만드는, 하나의 범주이자 유토피아이자 이데아다. 인간은 (오늘날의, 근대사회의 개인은) 일상에 함몰된
동시에 일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일상--의 세 번째 정의--이란 또한 양자를 서로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이 두 가지 움직임의
모호성이다.
이로부터 일상 연구가 지향하는 다양한 방향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느 순간엔 사회학, 그 다음엔 존재론, 그
다음엔 정신분석학, 정치학, 언어학, 문학 등과 관련되기도 하는.) 이러한 움직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배반해야 한다.
일상은 (뒤처지고 뒤에 남게 되는 것,우리의 쓰레기통과 묘지들을 채우는 삶의 찌꺼기: 파편과 폐물들인) 상투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우리를 존재의 자발성 그 자체와 있는 그대로의 삶으로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이 상투성은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살게 되는 그 순간, 그 상투성은 모든 사변적 공식과, 어쩌면, 모든 일관성과 규칙성까지도 벗어나는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체호프와, 혹은, 심지어 카프카의 시까지 끌어내서 피상성의 깊이, 무용성(nullity)의 비극을 긍정케 된다.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칙칙한 (무정형적(amorphous)이며 정체된) 일상과, 형태와 구조--특히 관료제와 정부의 중추기구나 정당 등과
같은 정치적 사회--를 언제나 벗어나는, 무궁무진하고, 거부할 수 없으며, 언제나 미완인 일상, 이 양자는 언제나 만난다. 이
대립된 양자 사이에서도, 강조점을 미묘하게 이동시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로질러 가게 되면, 어떤 동일성의 관계 같은 것이 보일
때도 있다. 자발적이고, 비형식적인 것--즉, 형식을 벗어나 있는 것--이 무정형의 것이 되기도 하고, 정체되어 있던 것이 사회의
움직임 그 자체인, 삶의 급류에 합류되기도 한다.
일상에 다른 어떤 측면이 있든 간에, 그것은 한 가지 본질적 특징만은 늘 가지고 있다. 일상은 장악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일상은 달아난다. 그것은 무의미에 속하지만, 이 무의미성은 어떤 진실도, 현실도, 비밀도 없는 반면, 모든 종류의
의미화가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 일상은 달아난다. 이 점이 일상을 그토록 이상한 것으로, 뭔가 익숙한 것이 (어느 샌가 흩어져)
놀라운 어떤 것의 외피를 쓰고 나타나게끔, 만든다. 그것은 지각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늘 그것을 지나쳐 봤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체로써 제시될 수도, 파노라마적 영상으로 “조망”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지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의 또
다른 특징은, 우리가 그것을 결코 처음 보는 것이 아니라, 벌어지는 일상의 구성요소인 환영(illusion)으로 항상 이미
보았던 것을, 다시 본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하찮고, 표면적으로는 우스운, 그러나 필연적인-- 위기(exigency)는 우리들로 하여금 일상에 관해
언제나 좀 더 직접적인 지식을 구하도록 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위대한 동어반복(Great Pleonasm)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이 일어나고, 일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에 포착하고 싶어한다. 사건의 이미지들과 그것을 전송하는 말들이 우리의
망막과 귀에 즉각적으로 각인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 전반적인 전송의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건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엄청난 동어반복의 군림”. 삶이 이처럼 직접적으로, 공공연히 드러날 경우에 나타나는 불이익은 이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언어, 문화, 상상력 등과 같은 소통의 수단이 수단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그 중재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미지나 언어를 통하지 않은 채, 직접적으로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는 아무 것도 말하거나 보여주지 못하는,
한없이 집요한 장황함만 대하고 있을 뿐이다. 라디오를 켜놓은 채 방을 나가면서도, 멀리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이
소음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부조리한가? 아니, 조금도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특정인이 말을 하고 다른
특정인이 듣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말하고, 다른 누군가가 듣고 있지 않을 때조차, 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고독한 말들이 끊임없이 오고 감으로써, 소통이 보장되는 어떤 불확정의 약속 같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일상을 자기 수준에서 회복하려는 이러한 시도 속에서, 일상이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때의 일상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보여지고 드러나는 스펙터클이고 묘사일 뿐이며,
여기엔 그 어떤 종류의 능동적 관계도 없다고 할 것이다. 온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보여지는 것(look)으로서 주어졌을
뿐이다. 그 이미지를 처음엔 흥미에 찬 시선으로, 그 다음엔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 다음엔 텅 비어있지만 매혹된
시선(look)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건들에 의해 부담을 받지 않게 된다. 텔레비전 덕분에, 편안하고 안전하게
쉬면서 동시에 시위 현장에 있을 수도 있는데, 가두 시위에 참여한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때 그것은,
생산되고-재생산되어, 우리 시각에 총체적으로 그 자신을 제공하면서, 우리가 최고의 증인이 되는 한에서만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실천을 대체하는 것은 무책임한 응시의 사이비(似而非)쯤 되는 어떤 것이고, 개념의 움직임--과제와 작업--을 대체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무심하고, 만족스런 관조라는 소일거리이다. 사방을 둘러싼, 익숙한 존재라는 벽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는 인간은
그가 보고 듣는 것들로 인해 자신이 변화될 리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위험도 담지하지 않은, 세계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한다. 이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탈정치화”다. 언제라도 정치적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거리의 사람들
때문에 거리를 두려워했던 정부의 관리는 단순한 스펙터클의 사업가가 되어, 우리 안에 있는 시민의식을 능숙하게 잠재우거나, 혹은
어슴푸레 반쯤만 깨어있게 만들어 놓고, 우리가 지칠 줄 모르고 이미지들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만 채우고 있을 때 한없이 기뻐한다.
소통수단의 강력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달아난다. 이것이야말로 일상의 정의다. 그러므로 지식을 통해 일상을 찾고자 하면
놓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상이란, 아직 공식화되지 않은 채, 즉 정보가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도, 이미 항상 말해진 한에서는 모든 관계에 선행해 있는 것과 같이, 여전히 알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상학에서 광범위하게 썼던 것처럼) 내현적인/암묵적인(implicit) 것이 아니다. 확실히, 일상은 항상 이미 거기에 있지만,
거기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일상의 현실화를 담보하진 못한다. 오히려 일상은 그것이 현실화(actualization) 되는
바로 그 순간에 항상 실현되지 않은(unrealized) 것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중요하든 한없이 미미하든 관계없이, 그 어떤 개별 사건도 일상의 현실성을 생산해낼 순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것이 곧 일상이다. 하지만 이
정지된 움직임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란 대체 어느 층위에 위치하고 있는가? 만약 내게는 반드시
언제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일상의 “누구?”에
대응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속에서, 뭔가 본질적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왜
동시에 긍정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라니!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 질문들에 천착해 보기라도 해야 한다. 파스칼이 처음으로 이런 질문들에 접근해
보았고, 젊은 루카치와 몇몇 다른 모호성의 철학자도 이어서 이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상이란 모호성으로 위장하고 있는 삶이고,
“삶은 분명함-불분명함(clair-obscur)의 무질서이다. . . 완전히 실현되는 것도, 궁극의 가능성에 도달하는 것도 없다.
. . . 모든 것은, 아무 분별없이 서로 스며들고, 불순한 혼합물 속에서 모든 것은 파괴되고 부서져, 아무 것도 현실적 삶으로
꽃피지 못한다. . . . 그것은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묘사될 따름이다. . . .” 이것이 이쪽으로 움직였다, 저쪽으로
움직였다,하는 파스칼적 전환이다. 이는 불안한 정적 속에 미결정된 채로 머물면서, 문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모순을 이용하는,
모호한 존재가 사용하는 영원한 아리바이다. 이것이 바로 (진부한) 일상의 혼란이다. 삶을 모조리 차지하는 듯, 거기에는 한계가
없고, 그것은 다른 모든 삶을 비현실로 내리친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갑작스레 명료성이 생긴다. “진부함의 길 위에 뭔가가 갑자기
번쩍하면서 섬광처럼 나타난다. . . . 그것은 우연, 위대한 순간, 기적이다.” 그리고 기적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삶을
관통하고 . . . 전체를, 나머지 것들과는 무관한, 간단명료한 하나의 설명으로 바꾸어버린다.” 섬광을 통해, 기적은 하루하루의
삶에 있어 불분명한 순간들을 분리해내, 미묘한 뉘앙스를 차단하고, 불확실성들에 개입하고, 우리에게 하나의 비극적 진실을,
절대적이며, 절대적으로 분리된 진실을 밝힌다. 이 진실의 두 부분은, 양 측면에서, 중단 없이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매
순간 요구한다.
이러한 사유의 흐름에 대해서는, 그것이 일상을 놓치고 있다는 점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하루하루의 평범함이란
어떤 특별함에 대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놀라운 순간”을 기다려서 그것에 의해 억제되거나 중지됨으로써 의미가
부여되는 “무의미한 순간(nul moment)”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찾는다면, 그것이 네/아니오라는
식의 진위 판정이 적용되지 않는 어떤 영역이나 어떤 층위의 말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일상은, 그에 대한 긍정 이전에 언제나
존재하고, 그에 대한 모든 부정을 넘어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기분전환의 방식으로 살고 있을 때조차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심각하지 않은 진지함.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무감각하게 갑작스레 이해하는 방식이랄 수
있는, 지루함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한다. 이 일상 속에 한가한 시간의 평준화를 끼워 넣어, 그 안에 영원히 빨려 들어갔다고 느끼는
동시에 이미 잃어버렸다고 느껴, 일상이 과연 결여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인지조차 결정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말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 갇혀있을 때 이산화탄소가 축적되듯이 증가하는 지루함과
지루함의 연속 안에서 유지된다.
지루함이란 일상이 드러난 모습이다. 이는 일상이 지각되지 않는다는 본질적 --구성적-- 특성을 상실해 나타난 결과다. 따라서 일상은
우리를 드러나진 않지만 숨겨져 있지도 않은, 존재의 어떤 부분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 부분이란 의미화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무의미하고, 고요하지만 우리가 그 고요에 귀 기울이기 위해 숨죽이는 순간 이미 흩어져 버리고, 우리가 하릴없이 수다 떨
때,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를 둘러싼 말해지지 않은 말, 부드러운 중얼거림 가운데서 더 잘 들린다.
일상은 개인이, 마치 깨닫지도 못한 채, 인간의 익명성 가운데에 붙들리게 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름도 없고, 사적인 현실도 거의 없고, 얼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우리를 지탱하거나 둘러싸는 사회적 결정이 없는
것처럼. 분명히 나는 매일 일을 하긴 하지만, 일상의 측면에서 나는 노동 계급에 속하는 노동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일의 일상은 그
진실을 확립하는 집단적 노동에 내가 속하는 것을 막는 경향이 있다. 일상은 심지어 자신이 무감각하게 야기한 형식의 폐허 뒤에서 그
일상을 끊임없이 다시 그러모으는 와중에도 구조를 파괴하고 형식을 무화시킨다.
일상은 사람이다. 대지, 바다, 숲, 빛, 밤, 이런 것들은 일상성을 대변하지 못한다. 일상성이란 일차적으로 거대한 중심
도시들의 조밀한 존재에 속한다. 일상의 경험이 우리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도시라고 하는 훌륭한 사막들이 필요하다. 일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인 집에 있는 것도, 사무실, 교회 같은 데 있는 것도, 그렇다고 도서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거리에 있다. 여기서 나는 르페브르 책 속의 아름다운 순간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그는
거리에는 역설적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것이 연결해주는 공간들보다 더 중요하고, 그것이 반영하는 사물들보다도 산 현실을 더
풍부하게 품고 있다. 거리가 공중(public)을 만든다. “거리는 모호성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들춰내고, 다른 곳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을 공표하여, 그 형태를 변형시키지만, 그것을 사회적 텍스트 속에 삽입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공표된 일은
정말로 밝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해지지만 이 “말해짐”이 실제로 발화된 단어 속에 담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는 마치
소문이란 것이 아무도 전한 적 없는데 전해지고, 그 소문을 전한 이 역시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위험스런 무책임함이 이로부터 기인한다. 사람들이 마치 진실과 거짓의 구별 바깥에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일상이란 사실,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거부에 의해 지배되는 삶의 층위인, 아직
미결정된 동요(undetermined stir)다.시작도잊고
끝도 지워버려, 책임감도, 권위도, 방향도, 결단력도 없는, 무질서의 창고. 이것이 일상이다. 그리고 거리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책임하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보면서도,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목격자가 되지 못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진 못한다. 이는 그가 비겁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고, 실제로 거기에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거리의 인간이 거기에 있을 때 거기에 있는 건 누구인가? 기껏해야 “누구?”라는 이 질문은 누구에게도 귀착되지 않는다.
동시에 무관심하면서 호기심 가득하고, 바쁘면서도 한가하고, 불안정하면서도 고정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그다. 이처럼 대립되면서도
병치된 특징들은 화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를 거스르면서도 결코 합류되지는 않는다. 모든 종류의 변증법적 회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것은 바로 변천(vicissitude) 그 자체다.
위의 내용에 덧붙일 것이 있다. 소문의 무책임성--쉴 틈 없이, 끊이지 않고 모든 것이 이야기되고 모든 것이 들려오면서도, 그
어떤 것도 긍정되지 않고, 그 어떤 것에 대한 반응도 없는--이란, 소문이 “여론”을 불러일으켰을 경우, 그 무게감이 급속히 증가한다. 물론 전파되는 것이
(아주 편리하게) 정치선전의 움직임이 되는 한에서만 그렇다. 다시 말해, 거리에서 신문으로, 또는 부단한 생성의 과정에 있는
일상이 전사(轉寫)된 일상으로 (“새겨진(inscribe)” 것이 아니다) 통과하는 과정에 있을 때, 그것은 정보화되고,
안정화되고, 유리하게 제시된다. 이 번역 과정이 모든 것을 바꾼다. 일상에는 사건이 없다. 신문에서는 이러한 사건의 부재가 기사
거리로 탈바꿈한다. 일상에서는 모든 것이 일상이다. 신문에서는 모든 것이 기이하고, 숭고하고, 혐오스럽다. 거리는
과시적이지(ostentatious) 않고, 행인들은 알지 못한 채 스쳐가고, 가시적-비가시적이다. 거기엔 그에 걸맞는 진실도,
눈에 띄는 특징도 없이, 그저 스쳐가게끔 운명지워진 사람들 얼굴의 익명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익명의 “진실”만이 재현될
뿐이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리는 언제나 우연이거나 실수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갈 때, 우리는 우선 정체성이 부재하는 존재방식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
그런데 신문은 모든 것을 발표하고, 모든 것을 고발하고, 모든 것을 이미지화해 버린다. 그렇다면 거리의
비과시성(nonostentation)이 어떻게 일단 발표만 되고 나면, 한결같이 존재하는 과시(ostentation)가 되는 것인가? 이는 뜻밖의
일이 아니다. 어떤 이는 확실한 변증법적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일상의 무의미성을 포착할 수
없는 신문이 그 가치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선정적이라고 선언하는 것이고,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움직임은 따라가지 못하는
신문이 그것을 포착하는 길은 드라마틱한 재판의 형태로 내놓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 속하지는 않지만, 금세라도
역사로 터져나올 문턱에 서 있는 어떤 것을 포착할 수 없는 신문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붙들고, 일화만을 따라간다. 따라서 신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기삿거리의 공허함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일상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수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그러나 일화 이상이 되지 못하는, 역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신문은 일상의 모습을 한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타협안으로 신문은 --물론 자격미달인 일상을 놓치는 정도와 비교하면 역사적 현실을 배반하는 정도가 덜하긴 하지만-- 아무 특수성 없는 이
현재에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즉, 긍정하고 전사(轉寫)하기 위해, 헛되이 온갖 궁리를 해가며 우리에게 그것을 제공하고자 한다.
일상은 달아난다. 대체 왜 달아날까? 왜냐하면 거기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아갈 때의 나는 그게 누구든, 그렇게
행동하는, 그 누군가이고, 이 누군가는(any-one), 제대로 말하자면, 나도, 제대로 말하자면, 그렇다고 타자도 아니다. 그는
나도 타자도 아니고, 또 상호교환가능한 존재인 한, 상호교환 불가능성이 폐기된 한에서는, 나이기도 하고 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엔 변증법적 인식을 가져올 “나”도 “제2의 자아"도 없다. 동시에, 일상은 객관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진공 청소기,
세탁기, 냉장고, 라디오, 자동차 등에 의해 대표되는) 별개의 기술적 행위들의 연속을 통해 살아지는 것으로서 일상을 산다는 것은
비록 불연속적 양상이긴 하나, 끊임없이 인간 가능성의 불확정적 총체성과 관계되는 --전체는 물론 아니지만-- 연결된 이 움직임, 무한한 이
존재감을, 몇 개의 구획된 행동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물론 일상은 진정한 주체에 의해 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하여 주체의 관념까지도 의문에 부치지만) 끝없이 사물들 속으로 침잠한다. 이 누군가는 양식(良識)을
통해 모든 것을 평가하는 보통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일상은, 르페브르가 지적한 것처럼, 소외들, 페티시즘들, 사물화들이 그
효과를 생산하는 매개체다. 일상생활 외에 다른 삶이 없는, 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일상은 가장 무거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이에 대해, 존재하는 일상의 무게에 대해 불평하는 순간, 대답은 곧바로 돌아온다. “일상은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거기다, 뷔흐너의 단톤처럼, 덧붙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언젠가 변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 같은 건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다.”
일상의 위험한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예기치 못한 비약에 의해 번번이 우리를 물러서게 하는
불편함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심을 품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막상 직면했을 때면, 정확히 무(nothing)만이 우리를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뭐?” “이게 내 일상생활이야?” 그러나 의심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은밀한 파괴력을, 인간의 익명성이 지닌 잠식력을, 그리고 마멸되어가는 무한성을 다시
포착할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영웅이란, 용기가 있는 인간인 동시에, 일상을 두려워하는 자다. 일상 안에서 너무 쉽게 살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두려운 것--소멸(dissolution)의 힘--을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일상은
영웅적 가치들에 도전하고, 심지어는 모든 가치, 그리고 가치라는 관념 그 자체를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진정성과 비진정성 사이의
불합리한 차이를 매번 새롭게 반증한다. 일상적 무관심은 가치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층위에 놓여있다. “il y a
quotidien (일상성은 있다)” 주체도, 대상도 없이. 그리고 일상이 거기에 있는 한, 일상의 “그(il)”는 설명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들어설 자리를 찾으려 한다면 “그”는 “무”가치하고, “무”는 그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뭔가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일상성을 경험한다는 것은, 일상성의 본질이라도 되는 듯한 근본적 허무주의에 의해 시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생명력을 부여한 공허함 안에서도 자기 비판의 원칙을 결코 놓지 않는 것이다.
대화(dialogue) 형식으로 된 결론
“그렇다면 일상은 유토피아가, 신화를 잃어버린 존재에 관한 신화가 아닌가? 역사의 결말을 역사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순간을 접하는 것 이상으로 일상에 접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게 된다. 일상이란 우리가 항상 이미 통로를
가지고 있었으나, 접근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일상은, 그에 응하는 모든 양식이 생소하다는 한에서만 접근불가능하다. 일상적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시작이나 접근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삶의 층위에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은 최초의
위기(exigency)를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친다. 창조 개념이, 일상에 의해 지탱되는 존재를 설명하는 문제일 때, 그것은 용납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일상적 존재는 단 한 번도 창조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il y a quotidien (일상은
있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다. 심지어 창조주 하나님을 긍정하도록 강요될 때조차, “있다”라는 것은 (존재가 아직 없을
때조차도 이미 있고, 아무 것도 없을 때조차 여전히 있다) 창조의 원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있다”가 인간의
일상이다.
--일상은 우리 몫의 영원, 라포르그(Laforgue)가 말했던 ‘영원한-무화성(eternullity)’이다. 그렇게 되면
주기도문은 은밀하게 불경스러운 것이 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창조주와 창조물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남길
여지가 없는 일상적 삶을 주십시오.' 일상적 인간은 모든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무신론적인 인간이다. 너무나 무신론적이어서 신이든
뭐든 그와 결부되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으로부터 거리의 인간이 어떻게, 정치, 윤리, 종교를 막론한, 모든 권위로부터
달아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일상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래서 곧 일상적 진실의 불가사의한 힘이자 무게도 가능한 것이다.
--누구의 공간에서도, 그러나, 진실이든 거짓이든 존재하지 않는다.